[메일러] 나의 우울한 프리티걸
나의 우울한 프리티걸
* 메일러.
* 브라이언 x 로저리나
* 가정폭력 소재 주의
나는 타인의 삶에 대해 가끔 생각하곤 했다. 원래 산다는 것은 이렇게 힘이 드는 거냐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어제 본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말했다. 산다는 것은 네온사인 아래서 춤추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삶은 빛나고 있는가? 빛날 만한 것들은 이미 모두 다 무너져버리지 않았나? 좆같다. 이게 누구 탓인가. 내 탓은 아닌데. 설마 내 탓인가? 근데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래? 내가 존나게 예쁜 것도 잘못이야?
로저리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엉엉 울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몹시 자주 울었다. 하지만 아무도 너가 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생각을 그만 하자. 생각을 그만. 이제 정말로 그만. 브라이언? 걔 생각은 이제 제발 그만……. 로저리나는 얌전히 주저앉아 제 머리카락을 감싸 안고 중얼거렸다. 그 자식 목소리 그만 떠올려. 얼굴도 그만 상상해. 그런데 아까 걔 자세 숙였을 때 향이 참 좋았지. 남자애가 향수도 뿌리나? 아니, 생각 좀 그만 하라고, 기지배야! 로저리나는 혼자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잔뜩 화를 내던 여자애는 기운이 쭉 빠져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주 좁아서 손톱만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 모서리부터 곰팡이가 흉측하게 번져 있었다. 이미 교체할 시기가 지나 겨우 연명하고 있던 형광등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장마철마다 벽지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우울한 냄새를 풍겼다. 제 좁디좁은 방에 누워 있던 로저리나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제 처지는 분명 그의 삶과는 몹시도 다를 거였다. 나를 걱정한다는 너의 말은 무슨 뜻이었지? 너는 정말 나를 이해하고 염려할 수 있나? 로저리나는 의구심을 가졌고 다시 성이 났다. 여자애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한숨이라도 쉬려는 찰나 현관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일어난 여자애는 잽싸게 일어나 불을 끄고는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모로 누웠다. 제발 닥치고 얌전히 자라, 새끼야... 간절히 눈을 감고 있던 여자애는 이내 제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다. 오늘도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로저리나, 로저리나. 지금처럼 자신의 이름이 역겨운 순간이 있을까? 여자애는 금세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고, 너무너무 불안했고, 약간 토하고 싶었고,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불 속에서 떨던 로저리나는 생각했다. 지금이 여름인 거 맞지? 여름 맞나? 왜 이렇게 춥지? 목소리가 계속해서 여자애의 이름을 읊었다. 한숨 한 번을 쉴 여유조차 없었다.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힘이 들었다.
***
브라이언은 어제 자신이 보았던 장면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애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어떤 중년의 남성이 그 애의 앞에 서 있었다. 행인들은 그들을 훑어보다가 금세 풍경 너머로 사라졌다. 브라이언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애는 항상 반에서 가장 빛났고, 그 애가 말할 때면 오후의 늦은 꿈이 흘러가는 것 같았고, 예민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또 그 앤 얼마나 새침한지 몰랐다. 여자애는 항상 애정 없는 눈으로 자신 주변의 세계를 훑었다. 그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보통 그렇지 않았는데도. 반 남자애들은 그녀가 예쁘지만 못된 년이라고 했으나 브라이언은 그녀를 좋아했다. 그 애를 처음 보자마자 좋아했는데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좋아한다, 라는 말에는 너무 커다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여자애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진짜. 무엇이 저 애를 벌벌 떨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저렇게 도도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잔뜩 떨고 있을까? 브라이언은 의구심을 가졌다. 남성은 그녀의 발치에 침을 뱉었고 머리를 몇 차례 건드렸고 브라이언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선생님.
중년 정도 나이대의 남성들은 선생님, 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한다는 걸 브라이언도 알고 있었다. 뭐야ㅡ, 새끼야. 남자에게서 오래 묵은 술 냄새가 났다. 남성은 그를 칠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다시 여자애 옆에 가래를 뱉었고, 그리고 물러났다. 아마도 브라이언이 그보다 더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브라이언은 그가 추잡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여자애는 금세 브라이언을 노려보았다. 그 애는 부들부들 떨었고,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쏘아붙였다.
니가 뭔데 나대? 니가 뭔데 참견해?
딱히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황스러웠다. 브라이언은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데? 여자애는 입을 앙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여자애는 몸을 홱 돌려 빠르게 멀어져갔다. 마치 저에게서 도망치는 듯한 걸음이었다. 너 무릎이 까져서 엄청 새카매졌어. 브라이언은 그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브라이언은 멀어져가는 여자애의 금발머리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그 표정이, 아주 오래오래 생각이 났다.
그는 너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
다음날 브라이언은 로저리나에 대해 아이들에게 묻고 다녔다. 브라이언은 제법 학교에서 신뢰를 사고 있는 모범생이었고, 그래서 아이들을 순순히 여자애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들은 대부분 로저리나가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부부의 딸이며, 부부는 해외로 나갔고 딸은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로저리나에 대해서는 그러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여자애가 스스로 그러한 소문을 퍼뜨린 거였다. 브라이언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다. 브라이언은 여자애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로저리나는 학교에서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 애 주변에는 항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이 바퀴벌레처럼 드글드글했다. 여자애는 빛이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을 부나방처럼 그 애 주변에 몰려드는 것이었다. 모두가 적어도 너의 외관만큼은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교를 할 때만큼은, 여자애는 다른 이와 함께하는 법이 없었다.
여자애는 빠르게 걸었다가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멈추지 않았다. 여자애가 걸을 때마다 머리에 달린 리본이 힘없이 흔들렸다. 여자애는 점점 더 깊은 골목길로 돌아갔다. 그곳은 도시의 부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대신 사창가며 술집, 싸구려 클럽과 도박장이 아주 많았다. 거리마다 약쟁이들이 늘어져 있었고 소매치기들이나 양아치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도시의 한편에 위치한 우범지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곳에 직접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본격적인 밤 장사를 시작하기 전의 골목은 한산했고, 나뒹구는 쓰레기가 아주 많았다. 브라이언은 이 곳을 홀로 걸어가는 여자애가 걱정스러웠고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고 브라이언을 발견했다. 그 애는 금세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뭔데?
여기 위험한 동네잖아.
그러는 너는 여길 왜 오는데? 니 보모는 너 여기 오는거 말리지도 않냐? 설마 나 따라온 거야? 스토커지,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존나 음침한 새끼.
로저리나는 브라이언이 미처 해명을 하기도 전에 자기 말을 마구 쏟아내는 버릇이 있었다. 유명 교수의 아들인 브라이언이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등하교한다는 것은 이미 전교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여자애의 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브라이언은 진심을 담아서,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너가 걱정되어서 온 거야.
니가 왜 날 걱정하는데?
왜냐면.
브라이언은 선뜻 말을 꺼냈지만 뒷말을 잇지 못했다. 널 좋아하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은 아주 큰 결심이 필요했고 브라이언은 그 정도까지 결심이 굳지 않았다. 언제나 느꼈지만 그 말에는 일정한 무게가 따랐다. 함부로 뱉어내는 건 책임감 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머뭇거리다가 ‘그냥’, 이라고 덧붙였다. 그냥, 이라니 얼마나 무성의한 말인지. 브라이언은 후회했고 여자애는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존나 돌아버리겠네. 여자애는 중얼거리더니 이내 답지 않게 한숨을 폭 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알았어.
우리 집 존나 파탄났고 애비란 새끼는 맨날 개패고 하루하루 뒤질 날만 기다리면서 살고 있으니까 같잖게 동정할 거면 그냥 꺼져. 씨발 동정 받는 게 제일 싫어. 알아?
음,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넌 평생 몰라. 좋은 집에서 오냐오냐 큰 애가 뭘 알아?
로저리나는 짜증스레 제 앞에 놓인 찌그러진 캔을 걷어찼다. 캔은 탁, 탁, 탁, 하면서 골목 한복판으로 굴러갔고, 지나가던 자동차 바퀴가 그것을 다시 짓밟았다. 로저리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곽을 꺼냈는데, 유감스럽게도 거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삐딱하게 브라이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나 진짜로 걱정되면 담배 사다주라.
진심이야?
어. 존나 피고 싶어.
정말 우습기도 하지. 브라이언은 순순히 골목의 구멍가게에서 여자애가 지칭한 담배를 사다 주었다.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 일미리요. 브라이언의 말에 계산원은 순순히 담배를 내 주었다. 교복 재킷을 무슨 수트로 착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브라이언의 키가 평범한 성인보다도 훌쩍 큰 탓이거나. 하여튼 여자애는 담배를 얌전히 받아들었고, 새침하게 입술을 내밀다가 고맙다고 말했고, 브라이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머쓱하게 말했다.
라이터도 사다줄까?
내가 그것도 없을 것 같애?
있으면 됐고. 둘은 어색하게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 늘어진 남자들을 지나칠 때마다 그들은 로저리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브라이언은 그들을 딱 한 대씩만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로저리나는 도통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걸었다. 타박타박. 그 애의 리본 달린 구두가 바닥에 부딪쳤다. 브라이언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녀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걸었다. 브라이언이 한 보폭을 내딛으면 로저리나는 두 번이나 걸음을 옮겨야 했다. 나 이런 거 너무 귀여워, 라고 말하면 돌아올 로저리나의 반응을 상상하다가 브라이언은 혼자 웃어버렸다.
뭘 쪼개.
별거 아냐. 근데 우리 저녁 먹을까?
돈 없거든.
내가 사줄게.
진짜? 나 남이 사주는 밥 존나 좋아해.
근데 나도 좋아해줬음 좋겠어.
로저리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 소리야? 아무것도 아냐. 너 진짜 실없는 새끼다. 내가 좀 그래. 둘은 그런 식의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브라이언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고백할 뻔 했지만 결국 고백하지 않았다. 지금은 알맞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저리나는 담배 연기를 뱉으며 걸었고 브라이언은 담배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나는 맨솔 담배가 좋아. 그게 뭔지 모르는데. 담배 한번도 안 펴봤어? 응.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지구가 끝나는 곳까지 영원히 걸을 기세로. 너가 원한다면 달까지도 걸어갈 수 있게. 우주 가장자리부터 저녁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