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러] 여름의 연대기
여름의 연대기
* 메일러.
* 퀸 120분 전력 참여.(@Queen_120min) 키워드 「내가 널」
* 고등학생 AU.
'브리, 우리 도망갈까?' 로저는 불현듯 그렇게 말했다. '그럴까?' 브라이언이 되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로저가 다시 물었다. '너가 가고 싶은 곳으로.'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여기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아. 여기만 아니면.' 로저의 말에 브라이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다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로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 말에 로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 같다.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다.
***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아무도 삶이 이렇게 힘들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경고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살아내야 할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벅찼다. 고작 고등학생의 나이였는데도 그랬다. 삼년제 기숙 고등학교의 삶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어떤 자유도 용납되지 않았다. 고된 감옥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도, 브라이언과 로저가 키스를 하다가 선생 하나에게 들켰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배로 힘겨웠다.
그들의 작은 연애가 들킨 날에, 로저는 머리채를 잡혀 화장실에 질질 끌려갔다. 단단한 세면대에 얼굴이 몇 번이나 처박아졌다. 입술이 터지고 고인 물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물에 다시 얼굴이 잠겨졌고, 이젠 정말 죽겠구나, 싶을 때가 되어서야 다시 얼굴이 물에서 꺼내졌다. '씨발, 니네 학생한테 이렇게 좆같이 굴어도 돼?' 악에 찬 로저는 그렇게 외쳤다. '니들은 어차피 여기서 뭔 일을 당해도 몰라. 꿇으라면 꿇어. 호모짓 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억울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로저는 학교 밖에 저를 지켜줄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세상의 전부는 브라이언밖에 없었다.
너는 지금 무슨 나쁜 일을 겪고 있을까. 그 날 밤, 하루 종일 얻어맞으면서 로저는 브라이언의 생각을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걷어차이는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로저의 오른쪽 다리에 금이 가고서야 그 가혹한 폭행은 멈춰졌다. '다음에 다시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조용히 다녀.' 선생의 말에 로저는, 차가운 화장실 타일에 누워 비웃었던 것 같다. 니들이 하지 말라고 안 할 줄 알아? 니들이 걜 알아? 걔하고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뭘 알아? 로저는 오히려,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
계절은 여름의 한창을 지나고 있었다. 기숙사 방 안은 습하고 무더웠다. 선풍기가 기운 없이 떨며 돌아갔는데, 거기서 나오는 바람이라고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교복 셔츠는 지나치게 타이트해서 숨이 막혔다. 로저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고, 브라이언은 침대 아래에 기대고 앉아 기타를 두고 치고 있었다. 아주 손톱만큼만 열 수 있는 창 너머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었다. 로저는 눈을 감고 기타 소리를 들었다. 너는 꽤 재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렇게 기타 소리가 좋을 리 없었다. 로저는 행복하다고도 생각하다가 이내 좆같아졌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브라이언 옆에 앉았다. 브라이언이 로저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제 밤 샜다며. 좀 자 둬.
존나 쪄죽겠어서 잠도 안와.
로저는 한쪽 턱을 괴고 브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얼굴은 선이 참 곧았고 깊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로저가 처음 보자마자 반했을 만도 했다. 허나 로저는 브라이언의 뺨 한쪽에 난 상처가 영 신경이 쓰였다. 얼굴에 깊게 베인 상처여서 몇 주가 지나도 쉬이 낫지 않았다. 로저는 브라이언의 상처를 보게 된 그 날을 다시 상기해 보았다.
저 새끼들이 너한텐 뭔 짓 한 건데?
별 일 없었어.
로저가 다급하고 분한 목소리를 내자 브라이언은 웃으며 말했다. 대신 브라이언은 로저의 몸을 끌어안았고, 로저의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고, 터진 자국을 만져 주었다. 아프겠다거나 같이 욕을 해주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브라이언의 손가락이 로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고 그건 무엇보다도 큰 위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저의 분한 기분이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애인 얼굴에 칼빵을 놓다니, 선생들이라고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들이었다. 로저는 진심으로 그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몇 주가 지나도 그런 기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로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사납게 중얼거렸다.
여기 너무 좆같다.
나도 좆같은데, 그래도 너가 있으니까.
브라이언의 말에 로저는 피식 웃었다. 가끔씩 치고 들어오는 것이 능수능란한 브라이언이었다. 그의 말은 답지 못하게 로저를 두근거리게 했다. 대꾸하지 않던 로저는 브라이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사랑이란 말은 입에 담기 참으로 무거운 말이었지만 그치만,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그 동안 세상에서 로저 옆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다시피 했다. 쫓기듯 몰려온 이 학교에서 너를 만나게 될 줄이야. 둘은 만나자마자 급속히 친해졌고,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마저 좋아하게 되었다. 고백하는 것도 거의 망설이지 않았다. 그 때 로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야, 내가 널 좀 좋아하는 것 같은데. 닌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지금의 마음은 그 때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 맺혀 있었다.
응. 알아. 모를 리가 없잖아.
나 너 존나 사랑해.
로저. 나도 사랑해.
무심히 기타를 연주하면서, 브라이언은 그렇게 말했다. 그 대답은 참 듣기가 좋았다. 아무리 삶이 좆같아도 너를 생각하면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문득 로저는 말했던 거였다.
브리, 우리 도망갈까?
***
여름밤은 몹시도 고요했다. 학교 주변을 둘러싼 숲을 빠져나오면 커다란 도시가 있다고 했다. 희미한 달빛에 기대서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라일락 향이 나는 밤이었다. 흘끗 바라본 밤하늘은 보랏빛으로 감싸져 있었다. 로저는 문득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도망가면, 너 대학 못 가는 거 아냐? 가고 싶어 했잖아. 우주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잖아. 우주에는, 여기보다 더 좋은 세계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 브라이언은 제 등에 맨 기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대신에 음악 하면 되지. 너도 같이 해.' 로저는 피식 웃었다. '난 기타 못 치는데?' 브라이언 역시 따라 웃었다. '너 똑똑하니까 다른 거라도 독학하면 되지.' 그들은 마주보고 실없이 웃기만 했다. 학교 밖에는 더 나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바깥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래도 너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산다는 것은 참 불확실하고 두려운 법이었다.
아주 먼 곳에서, 모노톤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