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러] 無題
無題
*메일러
*퀸 120분 전력 참여.(@Queen_120min) 키워드 「소나기」
*사망소재 주의
새벽 두 시 오십 분. 브라이언은 펜을 들었다. 심야 라디오에서는 엘리엇 스미스의 Miss Misery가 아주 구체적으로 흘러나왔다. 이 계절에, 이 날씨에 엘리엇 스미스라니. 신청한 사람이 좀 악취미라고도 그는 생각했다. 어둑한 방에 희미한 스탠드 불빛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자, 무수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장마가 오려면 멀었다. 아마도 잠깐 지나가는 소낙비에 불과할 거였다. 브라이언은 창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응시하다가, 다시 종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상은 점점 축축해지고 있었다.
*
로저, 간밤에 몹시도 나쁜 꿈을 꾸었고 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등장했어.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일 년 만에 다시 너의 꿈을 꾸었어. 너는 참 화사하게도 웃고 있었지. 그 때, 기억나? 영화관에서 우리는 아주 싸구려 로드무비를 보았잖아. 내용은 천박했지만 너가 좋아하는 자동차가 잔뜩 나왔지. 너는 그걸 다 보고 나서, 자기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말했어. 그 날이 또 꿈에 나왔어. 너는 이렇게 말했지. ‘아, 존나 희대의 명작이야.’. 꿈에서 우리는 영화관에서 걸어 나왔어. 너는 도로에 세워진 차가 참 마음에 든다고 말했지. 너는 그 차로 신이 나서 걸어간 다음, 냉큼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어딘가로 떠나 버렸어. 나는 멀어지는 네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어. 너를 붙잡을 수도 없었어. 왜냐하면 너는 너무 빠르게 운전해서 떠나갔기 때문이야. 거기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너와 차는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너무 끔찍한 기분이었어. 영화관 앞에 한참 동안 서성거렸어. 그러다가 바로 깨어났지. 꿈에서 깼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 너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깨어나 버렸잖아. 너를 기다려주지도 못하고. 꿈속에서 너가 날 찾으면 어떡하지?
왜 하필이면 그날 일을 다시 꾸었을까. 왜 하필이면 자동차였을까. 아마 소낙비 소리 때문이었을 거야. 그 날에도 비가 왔었으니까. 로저 네 표현을 빌리자면, 존나, 씨발, 많이, 비가 왔으니까 말이야.
*
브라이언은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는 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자연 현상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비가 올수록 브라이언은 무뎌졌다. 사람은 언제고 그런 식으로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이제 브라이언은 비를 생각할 때 로저, 너를 떠올리지 않는다. 너를 떠올리기보다는 우산을 먼저 챙긴다. 너를 걱정하기보다는 출근길의 교통상황을 염려한다. 적어도 브라이언, 본인은 그렇게 믿었다. 이제 나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잊고 살아나갈 것이다. 너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지만 인간의 믿음이란 것은 참으로 기구하고 모질기 그지없었다. 브라이언은 오늘 꿈에서 깨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크게 한숨을 쉬었고,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았고, 스탠드 불빛을 켰던 것이다. 한참을 쓰고 나니 노래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디제이 목소리를 놓쳐서, 제목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But if you wanna leave, take good care. 그는 다시 펜을 들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
너는 답지 않게 낭만적인 일을 좋아했지, 로저. 조악한 장미꽃이나 내가 서툴게 쳐 준 기타 소리 같은 것들. 너에게 그런 걸 건넬 때마다 너는 어린 여자애처럼 웃었어. 우리의 짧은 연애는 항상 그런 식이었잖아. 나는 너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너는 얼굴이 새하얘질 정도로 웃다가 나에게 키스하는 것. 그러고 보니 꽃 축제에 갔던 일이 생각나. 우리는 결코 그런 축제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그냥 지나가다가 들어갔던 거였잖아. 대관절 이름도 종류도 알 수 없는 무수한 꽃들이 지천에 펼쳐져 있었어. 관광객들은 몹시도 적어서, 그 넓은 부지에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어. 너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녔지. 심지어 전날에 새벽 다섯시까지 함께 술을 먹었는데도! 정말 건강하던 시절이었어. 나, 이제는 그렇게 활기차게 살아가지 못해. 로저.
그날 꽃들 사이에서 웃던 네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말해주었어야 했어. 너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귀끝을 붉히면서 나를 한 대 갈겼겠지만, 그래도 말해주어야 했는데. 너에 대해 생각할수록 나는 후회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후회하면서 동시에 너에게 묻고 싶어. 왜 그런 식으로 떠났던 거야? 왜 그렇게 비가 무수히 쏟아지던 날에 차를 몰고 나간 거야? 너는 그날 나에게 잔뜩 화가 났었지. 나는 그 다툼의 이유가……, 너무 사소해서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어. 솔직히 이제 네가 좋아했던 계절도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너는 적어도 비 오는 날은 좋아하지 않았잖아. 그런데도, 왜, 그런 날에. 나를 그렇게 떠나버린 거야?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냥 사소한 추돌 사고라고 믿고 싶었어. 병원으로 갈 때도 비가 그렇게 많이 왔었어. 택시 기사가 말했지. 어휴, 뭔 비가 장마두 아니고 많이도 오네. 급한 일이라도 있나 봐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어. 속으로는 닥치고 빨리 운전이나 하라고 내뱉고 싶었지. 그 정도로 나는 급했어, 로저. 나는 너가 간절했어. 다리나 팔, 한 쪽이 부러져서 끙끙대고 있을 너를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로저. 너와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에 대해 말해봤자. 대체 무슨 소용이ㅡ.
*
펜을 쥔 팔이 좀 아파왔다. 이렇게 긴 글을 써낸 것은 오랜만이었다. 브라이언은 졸음에 살짝 침침해진 눈으로 다시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과연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했다. 사는 것도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브라이언의 삶에서 사람들이나 사건들은 언제나 스쳐 지나갔다.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에는 그게 참 서러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너가 떠난 것은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브라이언은, 로저 너를, 정말 지독하게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심야 라디오 방송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 방송의 천오백이십삼번째 밤, 함께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여러분. 디제이의 말을 들으면서, 브라이언은 서둘러 마지막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얇은 종이 옆에 펜을 내려놓았다. 황급히 스탠드 불빛을 끄자 방은 어둠에 퐁당 빠져들었다. 그제야 브라이언은 눈가를 마른 손가락으로 마구 비빌 수 있었다. 지금의 시절에는 해가 이르게 뜬다. 햇빛이 들어오기 전에, 어서 다시 눈을 붙여야 한다. 브라이언은 다시 침대로 들어가서 이불 아래 파묻혔다. 그가 남긴 몇 단위의 문장들만이, 너, 로저를 추억하고 있다.
*
우리의 연애는 참 애처로웠지. 그날 오던 비는 참 서글프기도 했지. 사랑해, 나는 여전히 너를. 그러니까 삼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R에게, 브라이언이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