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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러] 해독 불가능한 당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쓰는 봄밤

이 나. 2018. 12. 26. 17:10

해독 불가능한 당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쓰는 봄밤

 

 

* 재개발 직전의 T지구.

* 학생회장 브라이언. 브라이언이 챙겨주는 가난한 로저.

* 열여덟에서 열아홉까지.

 

 

 

 

 

S#1.

 

* 시간: 200X1027() 오후 520.

 

* 장소: 재개발 대상 T지구. 오물이 가득한 하천이 T지구를 감싸고 흐른다. T지구는 도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날이 갈수록 성장세를 이룩하는 도시. 공무원들의 눈에 T지구는 볼썽사납다. 그래서 밀어내기로 결정한다. 시청이 결정하자 사기업이 수주권을 따내고 고용된 용역들에 의해 주민들은 쫓겨난다. 주민들의 반대는 모기 소리처럼 약하다. 주민들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집들도 안개처럼 스러진다. 골목골목마다 가로등 불빛만이 글썽거린다. 그곳에 로저 테일러의 방이 있다.

 

 

 

로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열여덟의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아비가 먼저 떠났고 그 뒤로 어미도 떠났다. 그들을 한사코 붙잡으려고 애썼지만 소낙비처럼 떠나갔다. 때문에 로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다짐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절망뿐. 절망을 이기지 못한 로저는 오늘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날 담임이 묻겠지. '로저, 어제 아팠니?' 그 동안 로저는 문제없이 학교를 다녔다. 아마도 담임은 그의 상태를 염려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담임이 로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잖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로저는 생각한다. 그래서 담배만 뻑뻑 피운다. 담배를 너무 피운 나머지, 방 안의 벽지는 원래 아이보리빛이었는데 누렇게 떴다. 골목 사이로 까만 얼굴을 한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절망이 섞여 집집마다 들어간다. 멀리서 주택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곧 방을 빼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철문을 탁탁 두드린다.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고용된 폭력배들인가? 그런 이들이 자주 집에 찾아온다. 몇 대 맞아주면 그만이다. 로저는 문을 연다.

 

 

 

낯선 그림자. 누구? 의문을 가졌던 로저는 이내 답을 얻는다. . 브라이언 메이.

 

 

 

"뭐냐. ."

"밥 사왔어. 오늘 학교는 왜 안 온 거야?"

"내가 거지처럼 보여?"

 

 

 

로저는 브라이언을 노려본다. 재수없는 새끼. 모든 것을 가진 새끼들은 다 저렇게 재수가 없다. 대관절 무엇에 꽂힌 건지, 브라이언은 로저에게 몹시 상냥하다. 배를 곯는 로저에게 먹을 것을 사다주고, 과제를 챙겨주고, 하굣길을 함께한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로저가 한참을 물었지만 브라이언은 대답이 없다. 애매모호한 미소만 띨 뿐이다. 로저는 내심 결론 내린다. 이 새끼는 시간이 너무 넘쳐 돌아서 나를 돕는 것이다. 그 태도마저도 재수가 없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동의를 얻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로저에게는 친구가 없다.

 

 

 

브라이언은 수제버거 세트를 사들고 왔다. 맥도날드 같은 싸구려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분명히 한 접시에 최저임금 두 배는 넘는 비싼 버거다. 로저는 싫은 내색을 마구 내비치면서 그것을 베어 문다. 촉촉한 패티의 육즙이 입가에 흐른다. '천천히 먹어. 콜라도 마시고.' 브라이언이 티슈로 로저의 입가를 닦아준다. 다섯 살짜리 애새끼가 된 기분. 로저는 조금 수치스러워서 브라이언을 노려다본다. 로저가 식사를 다 해결할 때까지 브라이언은 방을 떠나지 않는다. 가만히 로저를 바라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거나, 나른히 기타를 친다. 참고로 브라이언은 밴드부에서 기타도 친다. 정말 너무할 정도로 재수가 없지 않은가. 로저가 식사를 해결하고 나서야 브라이언은 방을 떠난다. 문을 닫기 전, 브라이언은 뒤돌아 말한다.

 

 

 

"내일은 학교 와."

"꺼져버리기나 해."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로저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들의 사이는 무엇인가. 이상한 관계다. 친구인가? 친구가 보통 이러한가? 로저는, 브라이언 메이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로저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냥 재수 없는 새끼다. 평생.

 

 

 

 

***

 

 

 

 

S#2.

 

* 시간: 200X1029() 오후 730.

 

* 장소: T고등학교. 본관 3. 음악실과 복도. 교사들은 모두 퇴근했고, 학생들도 얼마 안 남은 상태. T고는 야간 자율학습을 운영하지 않는다. 엉망인 학교다.

 

 

 

 

이틀 전의 무단결석 때문에 로저는 음악실 청소를 도맡게 된다. 온갖 불평을 하며 음악실 자재들을 밀고 쓸고 닦는다. 복도 건너에서 또각또각 학생화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음악실 문은 절반 정도가 탁한 유리로 되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다. 로저는 숨죽이고 넘겨다본다. , 또 브라이언 메이다. 브라이언 메이와 여자애. 여자애의 이름은 모르지만 브라이언과 같은 학생회. 둘이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며 웃고 있다. 브라이언의 얼굴에 띤 웃음은, 로저에게 항상 보여주는 종류의 미소와 비슷하다. 로저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항상 성을 내고는 하지만, 조금 안심이 되긴 하는 것이다.

 

 

 

집까지 들어줄게.”

아니야. 별로 안 무거워.”

오늘 너가 애썼잖아. 그 정도는 도와주게 해줘. 샬롯.”

좋아. 허락할게. 우리 집, 어딘지 알지?”

 

 

 

여자애가 청사과를 깨문 듯 맑은 웃음소리를 낸다. 사랑스러운 여자애다. 여자애의 느린 걸음에 맞춰 일부러 천천히 떼는 브라이언의 보폭은, 누가 봐도 다정하다. 로저는 마음이 조금 울렁이는 것을 느낀다. 지금껏 로저는 철썩같이 믿어왔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만 잘해주는 것이라고. 헌데 그것이 아니었다. 브라이언은 모든 이들에게 상냥한 것이다. 아무한테나 친절한 브라이언. 지옥이 되어가는 로저의 마음. 하지만 로저는 자신이 마음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싶지 않다. 인정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로저의 마음에는 자존심뿐이 살고 있다. 브라이언과 여자애가 멀리 복도를 돌아 사라진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로저는 황급히 금발 머리를 흔들어댄다.

 

 

 

게다가, 로저는 믿고 있지 않았던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그건 브라이언 메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울렁이는 심장을 꾹꾹 누르듯이, 로저는 새까매진 손걸레를 꾹꾹 누른다. 커튼이 쳐진 컴컴한 음악실에서 홀로 한참을 있었다. 솔직히 외로워졌다.

 

 

 

 

***

 

 

 

 

 

 

***

 

 

 

 

S#3.

 

* 시간: 200X117() 오후 825. 이 시절에 떠도는 바람은 몸을 아프게 한다.

 

* 장소: T지구의 버려진 공사장. 이곳은 위협적이다. 양아치들과 폭력배들과 날라리들과 폭주족들이 점거하고 있다. 그러니 경고: 혼자 다니지 말 것.

 

 

 

 

로저는 친구가 없기 때문에, 혼자 다닌다. 혼자 다니는 예쁘장한 로저를 위협하는 녀석들은 많다. 다들 양심이 없는 놈팽이들. 하지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영리한 로저는 위협적인 상황을 잘 피해 다녔다. 하지만 오늘은 글러먹었다. T고에 다니는 같은 학년의 양아치들이다. 숫자는 다섯, 아니, 여섯?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로저는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칠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뒷걸음질치다가 쇠파이프 더미에 등을 부딪힌다. 아픈 기색을 내지 않으려 로저는 최선을 다해 참는다. 녀석 중 하나가 불쾌하게 킥킥거린다.

 

 

 

테일러. 담배 한 대 줄까?”

꺼져. 니네 던힐 피잖아.”

편하게 있어. 편하게. 에디, 이 새끼야. 너 말보로 하나 없냐?”

나 집 갈 거라고.”

 

 

 

로저의 선언에 녀석들 전부가 킥킥거린다. 한 녀석이 로저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그 손을 밀쳐낸다. 로저는 아버지에게 뺨을 후려맞았던 일을 생각한다. 이내 로저의 뺨으로 손이 날아든다. 아픈데 아프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로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욕하고, 노려보고, 발을 구르고, 뭐 그 정도다. 이 정도면 미약한 반항이다. 얼굴을 맞고 배를 걷어차이고 허벅지에 멍이 생긴다. 씨멘트 바닥에 뒹구는 로저를 내려다보며 제임스, 라는 녀석이 말한다.

 

 

 

너는 맞아도 이쁘장하다. 처음엔 키 큰 기지밴 줄 알았는데.”

니네 좆같다.”

한 번 대주면 이제 좆같이 안 굴게.”

 

 

 

와르르 터지는 웃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로저. 먼지투성이 금발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 로저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발걸음. 우뚝 멈추는 제임스 자식의 손짓. 과연 누가 찾아온 것인가? 양아치들의 머리 위편에 있는 용역 깡패들인가? 목소리를 들으니 그것도 아니다. 로저는 대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약간 안심이 되면서도, 도망치고만 싶다.

 

 

 

제임스. 경고 한 번만 더 축적되면, 이번에야말로 퇴학 처분 받지 않던가?”

그걸 니 새끼가 어떻게.”

경고 처리를 하는 게 나니까? 학생회가 왜 좋겠어.”

 

 

 

브라이언은 상냥하게 웃는다. 제임스가 브라이언의 발치에 침을 뱉는다. 놀랍게도 브라이언은 주먹 하나 휘두르지 않아도 녀석들을 쫓아낼 힘을 가지고 있다. ‘테일러 좀 내버려 둬.’ ‘얘가 니 깔이라도 되냐?’ ‘아니.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 로저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서 브라이언의 말을 되풀이한다. 그냥 친구. 그래. 이 재수없는 새끼야. 우리는 그냥 친구지. 내가 양아치들한테 두들겨 맞고 있을 때, 데리러 와주는, 그냥 친구. 아무리 맞아도 눈물 한번 안 보이는 로저, 괜히 눈시울이 화끈거린다. 양아치들이 물러선다.

 

 

 

로저는 겨우 씨멘트칠 바닥을 디디고 일어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분명 온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브라이언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로저의 어깨에 덮어준다.

 

 

 

추운데 왜 코트도 안 입고 나왔어?”

나 코트 없어. 새끼야.”

하나 사 줄게.”

됐다.”

 

 

 

동정하면 죽여 버릴 거야, 브라이언 메이.’ 로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곧 로저는 깨닫는다. 로저 정도의 처지면 누구에게나 동정받는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한테 동정받는 기분은 비참하다. 당해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

 

 

 

 

S#4.

 

* 시간: S#3와 거의 동일.

 

* 장소: T지구의 골목길. 불가피하게, 로저 테일러는 여전히 T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브라이언은 고민한다. 오늘은 로저에게 저녁으로 무엇을 사다주어야 할 것인가. 시간은 일곱시를 훌쩍 넘겼으나, 분명 로저는 저녁조차도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로저에게 잘 들어맞는다. 부모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예민하고 귀여운 남자애. 브라이언 메이는 그러한 로저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열여덟살에게는 너무 과분한가? 그렇다면 좋아한다고 수정하자. 로저 테일러를 좋아하는 브라이언 메이. 오늘도 로저의 식사를 사서 천천히 걸어간다.

 

 

 

처음 좋아하게 된 순간을 브라이언 메이는 똑똑히 기억한다. 일학년 첫날. 알 수 없는 환희로 부산했던 복도. 복도 한편에 잔뜩 경계의 눈빛을 세우고 있던 금발머리 하나. 브라이언은 무심히 그 애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그 애. 맨 처음 대화에서 이름을 물었었지. 아마?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하게.”

3반 아닌가? 나도 3.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로저. 이름 잘 어울리네.”

왜 뜬금없이 친한 척인데.”

 

 

 

로저는 금세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 애는 느끼는 바가 얼굴에 잘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그 작은 제스쳐들이 사랑스러웠고, 브라이언 메이는 이내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일 년이 지나고 또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저녁을 챙겨서 그 애의 좁은 방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T지구를 샅샅이 뒤지는 중이다. ‘로저 테일러!’ 큰 소리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곳곳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대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쏘다니다 말고, 공사장에서 그 애를 발견한 것이다.

 

 

 

브라이언의 눈에 로저는 가엾다. 특히 저렇게 맞고 있는 모습은 더 가엾다. 브라이언은 다가갔고, 아무 무게도 실려 있지 않은 경고를 했는데, 양아치들은 제뿔에 놀라 달아난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말라 비틀어진 어깨에 제 외투를 걸쳐준다. 그 어깨를 한참이고 안아주고 싶다. 근데, 그러면 로저는 놀라 도망칠 것이다. 아마 도시 끝까지 도망치고 국경 끝까지 도망치고 우주까지 도망쳐버릴 것 같다. 예민한 로저는 천천히 아껴줘야 한다. 그래서 어깨에 가만히 코트를 얹어주는 일에만 겨우 만족한다.

 

 

 

그렇게 둘은 함께 로저의 집으로 돌아간다. 타박타박 걸음소리. 가로등 불빛이 낭자하게 골목에 드리워진다. 두 그림자가 버려진 길가에서 위태하게 흔들린다. 절망을 숨긴 바람은 꽤 차다. 비로소 늦가을이다. 로저가 문득 말한다. 그 애의 목소리가 살폿 떨리는 것이, 추워서인지 아니면 긴장해서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니는 왜 나한테 잘해줘.”

친구니까.”

지랄. 닌 모든 애들한테 다 잘해주면서.”

너한테만큼은 안 그래.”

 

 

 

괜히 성을 부리는 로저. 로저의 속내를 브라이언은 파악할 길이 없다. 하지만 화를 내는 로저는 사랑스럽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건 귀여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브라이언은 피식 웃어버린다. 로저가 브라이언을 쏘아본다. 그러면서도 어깨에 걸쳐진 브라이언의 코트를 제 몸에 꼭 감싸 안는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다. 멀리서 T지구를 감싸는 하천이 불길하게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천에서의 고약한 악취 탓에 얼굴을 찡그리는 로저. T지구의 야경은 형편없다. 이 형편없는 거리. 둘은 걷고, 또 걷고. 로저의 방에 도착하는 길은 멀다.

 

 

 

저녁 다 식었겠다.”

뭐 사왔는데.”

샌드위치하고 밀크티.”

밀크티? 존나 뜬금없네.”

조심히 들어가. 내일 학교 꼭 오고. 그리고, 로저.”

?”

, 너한테 잘해주는 거, 꼭 습관 같아.”

 

 

 

브라이언은 당황한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모른다. 로저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것이 저의 의도치 않은 고백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브라이언. 얼굴이 붉어진다. 숨기려고 고개를 위쪽으로 쳐든다. 로저는 브라이언보다 키가 작아서, 붉어진 브라이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로저가 이내 픽 웃는다. ‘습관 한번 좆같은 거 가지고 있네.’ 로저의 말에 브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내린다. 가로등 불빛에 휘날리는 로저의 금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장소와 너. 브라이언이 한숨을 쉰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브라이언은 입을 연다.

 

 

 

로저, 우리, 연애해볼래?”

 

 

 

***

 

 

 

 

S#5.

 

* 시간: 200Y423일 일요일 오전 1125. 당신은 봄볕이 드는 이 시간을 사랑하는가?

 

* 장소: T지구의 천변(川邊). 천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재개발이 중단되었고 겨우내 깨끗해진 하천. 그러나 여전히 인적은 드물다.

 

 

 

 

 

꽃 보러는 처음 와 보는데, 여기.”

벚꽃, 너만큼 예쁘다. 로저.”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저기 물에 빠뜨린다. 저기 빠지면 감기 빼고는 다 걸린다는데.”

 

 

 

우스운 열아홉 살의 연애. 로저 테일러는 결국 학업을 중단한다. 대신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다행히, 재개발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방을 빼야 할 위험은 없다. 로저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희망의 내용은 절반이 브라이언 메이다. 브라이언 메이는 학교를 잘 다닌다. 학생회장 임기는 끝났지만 여전히 주목받는다.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을 목표로 두고 있다. 가끔은 브라이언도 불안한데, 그 위독한 불안의 절반을 로저와 해결한다. 그래서, 이 해 드는 오전에 함께 천변을 걷고 있는 것이다.

 

 

 

좀만 걷다가 점심 먹으러 가자.”

뭐 먹지?”

로저 너 먹고 싶은 거.”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시간. 햇빛의 향이 T지구의 구석구석에 퍼진다. 브라이언과 로저의 세계에 온통 분홍이 스며들고 있다. 브라이언과 로저는 손을 잡는다. 손을 잡고 또 걷는다. 그 수줍음이라니. 그 말간 얼굴을 한 다정함이라니. 그 열아홉이라니. 까마득한 하늘 저편에서, 흰빛 구름이 기억처럼 흘러간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