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계절
* 피폐 학원물.
* 군림하는 B의 충실한 심복, R.
* 소재주의.
“어머님. 로저가 친구들을 너무 괴롭혀요.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로저는 무료했다. 이미 수백, 수천 번 겪은 상황이었다. 담임의 말에 로저의 어머니는 몇 번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 자신의 삶부터가 고되다. 로저는 천천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 이른 비가 무심히도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가 창문에 올곧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그 풍경 너머에서, 로저는 브라이언을 발견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검고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서,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도 브라이언의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브라이언.
브라이언이 교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저는 씩 웃으며, 그에게 손키스를 날렸다. 창 너머로, 빗줄기 너머로, 로저의 키스가 닿기는 한 것일까? 브라이언은 로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로저는 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내 브라이언이 시선을 돌렸다. 로저는 잔뜩 아쉬워졌다. 브라이언은 떠나갔으나 로저는 물웅덩이가 고이는 운동장을 한참이고 내려다보았다. '로저, 집중 좀 해라.' 낭만을 깨뜨리는 담임의 말. 로저는 담임을 한 대 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
학교에서는 피해야 할 부류가 있다. 눈 마주치면 좋은 꼴 못 보는. 로저 테일러가 그 영역에 속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름을 날렸으며, 입학식에서 건방지게 군 삼학년 선배의 복부를 걷어찼고, 그런 식으로 전교에 알려졌다. 그야말로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어디서 온지 모를 악바리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악력이 엄청나게 강한 것도 아니었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 기질 때문에 결코 싸움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잘생겼고, 싸움 잘하고, 다소 무서운 편이고. 그런 로저 테일러에게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이라고 하기엔 그 녀석들이 일방적으로 납작 엎드리는 편이었으나 어쨌든 친구들이었다. 로저와 친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안팎을 쏘다녔다. 선생들도 그들 무리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엄격하게 통제하기엔 그들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로저, 오늘은 브라이언이 시키는 거라도 있었어?
-삼학년 육반. 제임스…, 뭐라던데.
-걔가 왜.
-B 면전에 대고 웃었대나.
-미친놈이네.
미친놈.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브라이언의 얼굴 앞에 대고 웃다니. 삼학년 씩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학교의 규칙을 모른단 말인가? 맞아도 쌌다. 브라이언의 명령을 직접 하달 받는 사람은 로저뿐이었다. 로저가 그 명령을 친구들에게 전했고. 브라이언에 대한 반항의 불꽃은 금세 사그라들곤 했다.
소각장 바닥에 담배꽁초를 떨어뜨렸다. 로저는 결코 담배를 비벼 끄지 않았다. 불이 나든 말든 무슨 상관? 제 소중한 아이다스 운동화-물론 누군가의 운동화를 강탈한 것에 불과하지만- 바닥에 담뱃재가 한참 묻는 것보다는 나았다. 로저가 일어서자 모두가 우르르 따라 일어섰다. 로저는 만족스러웠다. 삼학년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평하고 무료한 늦봄 오후. 자극제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관절 브라이언 메이, 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그의 경력은 대략 이러하다. 학생회장. 이과 전교 일등. 밴드부 리더. 방송부 부원. 유명 기업가의 아들. 188cm의 키. 꽤 다정해 보이는 성격. 누구라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선생들은 그를 사랑했고 학생들은 그를 존경했다. 홀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옆얼굴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차마 말 붙이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럴수록 모두가 브라이언 메이를 받들었다. 스스로 존경을 끌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브라이언이 그랬다.
로저가 교실 문을 열었고 브라이언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안녕, 브라이언.
-테일러.
-둘만 있는데 좀 상냥하게 불러주면 안 되나?
-학교잖아. 듣는 귀는 많아.
브라이언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제 몸을 기대며, 로저의 몸을 훑어보았다. 로저만치 브라이언의 충실한 심복도 없었다. 누가 보면, 로저가 브라이언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았다. 사실 어느 정도 약점을 잡힌 것은 사실이었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이름의 약점.
로저 테일러는 브라이언 메이를 사랑했다. 어떻게 브라이언을 안 사랑할 수가 있지? 로저 테일러는 의문을 가졌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새끼였다. 무엇보다도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로저는 겁이 없는 놈이었고 그래서 사랑을 깨닫자마자 바로 고백했다. 그때는 일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르지도 않았을 때였고, 그래서 브라이언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을 때였다. 브라이언은 그저 비웃었고 로저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 손은 무참히 브라이언에게 꺾여 내려왔다.
-날 사랑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테일러.
로저의 얇은 팔목을 붙들고서 브라이언은 그렇게 말했다. 브라이언의 악력은 굉장히 강력한 편이었다. 로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누군가의 발밑에 있던 적이 없는 로저였다. 하지만, 너한테만큼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그들의 일방적인 계약 관계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제임스의 볼을 붙잡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지?’라고 말했다. 어제는 옆 학교 전교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B하고 마주치면 허리 좀 숙이고, 인사도 하고.’라고 말했다. 그저께는 항상 B에게 적대적이었던 선생의 차 유리를 깨뜨렸다. 똑똑한 로저 테일러는 어떻게 협박을 하고 폭력을 가해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초장부터 주먹이 나가면 재미가 없었다. 브라이언 메이의 명령을 그렇게까지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학교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브라이언이 먹이사슬의 가장 위편에 있었다. 그 아래는 로저 테일러. 그 아래는 로저의 친구들. 그 아래는 선생이든 학생이든 하여튼 보잘 것 없는 녀석들. 로저는 이러한 관계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브라이언에게 묻곤 했다.
-브라이언. 너 지금, 행복해?
-행복한 게 뭔데.
로저는 브라이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 브라이언을 보는 자신은 너무 행복해서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언에게 꼭 필요한 사람. 굳이 연인이나 애인이 아니어도 좋았다. 로저는 행복했다.
***
로저는 키들키들 웃었다. 어제의 일이 자꾸 생각났다. 근처에는 학교가 많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녀석들도 많았다. 브라이언에게 유독 싸가지 없게 굴던 자식들이 있었다. 옆 동네의 H 고등학교. 브라이언은 딱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조용히 좀 시켜.’ 로저는 그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야구빠따와 각목, 그런 것들을 가지고 H고의 교문에 들어섰다. 이미 학교는 파한 시간이었고, 남은 자식이라고는 브라이언의 눈에 거슬리던 그놈들 뿐. 로저의 편이 이겼다. 아주 완벽하게 이겼다. 한 녀석의 입가에서 피가 찔찔 흘러나와 운동장 모래에 엉켜 붙었다. 로저는 매몰차게 웃었다. ‘그러게 B가 말할 때 좀 잘 듣지.’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전했다. 브라이언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네온사인 불빛에 브라이언의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웃을 때, 너무할 정도로 잘생겼다고 로저는 생각했다. 브라이언은 로저를 한참 내려다보았고, 날선 턱을 제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로저의 입술에 키스했다.
브라이언의 입술이 가지고 오는 감촉. 마른 입술과 마른 입술이 엉키는 감각. 천천히 입술을 애무하는 혀. 이내 안쪽으로 침범해 치열을 고르게 훑어내는 혀. 입천장을 매만지고 지나가는 혀. 엉키는 혀와 혀. 로저의 턱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침. 키스는 짧았다. 고작해야 이삼 분이었다. 하지만 브라이언과 키스하고 나면, 로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감히 브라이언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서늘한 골목길 씨멘트 벽을 붙들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기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로저 테일러는 브라이언 메이를 사랑했다.
-잘했어. 로저.
이름을 불러줬다. 로저는 감동하여 울지 않은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언은 얼굴의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양옆의 가로등과 네온사인과 그런 것이 그의 뒷모습을 화사하게 밝혔다. 로저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키들키들. 로저는 며칠이 지나서도 한참,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더 열심히 브라이언이 시키는 바를 따랐다. 또 누가 아는가? 자신이 일을 잘 해내면, 키스를 또 받을 수 있을지. 자신이 사랑하는 왕이, 감히 입맞춤으로 저를 치하해줄지.
***
로저의 악취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담배빵을 놓는 일. H고에서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흠씬 얻어맞으면 사람은 한동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시야는 그대로 어둠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 아무 곳으로나 기어가는 놈들. 그런 놈들을 보는 것은 좀 우습다. 로저는 천천히 놈을 따라가다가, 제가 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고, 놈의 살결에 비빈다. 꾹 누르고 몇 초를 기다린다. 끔찍한 비명 소리. 물론 고작 담뱃불 하나로 살 타는 냄새는 안 나지만. 옆에서 로저의 친구들이 낄낄거렸다.
-너 그딴 거 어디서 배웠냐?
-B한테서.
로저가 씩 웃었다. 브라이언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기분 나쁠 때가 있었다. 또한 로저가 해낸 일에 만족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냥, ‘경고만 줘’, 라고 했는데 로저가 엇박자로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팼다거나. 그러면 뒤처리가 상당히 곤란해지곤 했다. 브라이언은 일이 귀찮아지면 성질을 냈다. 로저가 들고 있던 담배를 뺏은 뒤, 로저를 밀쳐 의자에 앉히고, 그의 바지 위에 얹어놓곤 했다. 그렇게 몇 분이었다. 가냘픈 담배는 얇은 교복 바지를 금세 태웠다. 브라이언은 멈추지 않았다. 로저의 하얀 살에 담배 끝이 닿았다.
-아파, 브라이언. 아프다고.
로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브라이언은 대꾸하지 않았다. 꾹 다문 브라이언의 입술은 그가 화가 났음을 증명했다. 로저는 브라이언을 화나게 한 것을 후회했다. 다음 번에는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나서야 브라이언은 담배를 교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알아서 치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미안해. 브라이언. 용서해 줘.’ 로저가 브라이언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지만 그는 대꾸가 없었다. 로저는 기어갔다. 기어가서 꽁초를 제 교복 주머니 안에 넣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다음부터는 잘 하기로 로저는 마음먹었다. 실제로 명령을 잘 해내면 브라이언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실수라도 한다면? 로저의 허벅지는 다시 담배로 지져졌다. 허벅지에는 이제 열 개가 넘는 자국들이 있다. 로저는 샤워를 하면서 제 나신을 들여다볼 때마다, 브라이언이 주었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우스운 것은, 아무리 ‘고통’이라 할지라도, 브라이언이 주어서 좋았다는 점이었다. 로저는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너라면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좋다. 그러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