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 네모진 아파트, 스스로를 가둔 로저.

*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브라이언.

 

 

 

 

 

이 동네는 사이렌이 자주 울려. 구급차 한 대, 혹은 소방차 무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지나가는 사이렌 말이야. 사이렌은 어딘가 사람을 불안케 만들어. 로저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아래 입술을 앞니로 꾹 눌렀어. 비척비척 걸어가 창 아래를 굽어보았어.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차선 도로.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나 비명 같은 경적과 함께 차량들이 지나갔지. 로저는 빈약한 샷시를 손으로 꾹 쥐었어. 사이렌이 울린다는 건, 무엇인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불타고 있다는 의미야. 로저는 꼭 죽거나 불타고 있는 것이, 제 속에 잠든 마음인 것 같았어. 불안했지. 하루는 이 말을 브라이언에게 했어. 브라이언은 말했어.

 

 

 

 

/너를 불안하지 않게 할 방법을 찾아볼게.

 

 

 

 

그 방법으로 브라이언은 이사를 왔어. 로저의 아파트를 꼭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에. 로저가 칠 층이면 브라이언도 칠 층. 밤에 형광등을 켜고 손을 흔들면 보이는 거리. 이사올 필요까진 없다고 말했지만, 마침 계약이 끝나서 집을 옮겨야 한다고, 굳이 옮겨가야 할 것이라면 너와 가까운 집이 좋다고 브라이언은 웃었어. 언제고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어. 로저는 별볼일 없는 제 인생에서, 브라이언이 있는 것은 유일한 행운이 아닌가 생각했어. 인간의 생이란 것이 아무리 비참해도, 꼭 희미한 빛이 한번씩은 드리우는 법이야. 로저에게는 그 햇볕이, 브라이언. 브라이언도 로저를 그렇게 생각해줄까? 묻고 싶었지만 낯부끄러워 묻지 못했어. 사랑한다는 말도 잘 해내지 못하는 로저인걸.

 

 

 

 

로저가 언제부터 집 밖에 나설 수 없게 되었을까. 사람이 고립되는 데는 큰 비극이 필요한 게 아냐. 세상으로부터 자꾸 거절당하고, 밀쳐치고, 그래서 울었는데 아무도 내 울음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때, 그럴 때 사람은 스스로를 가둬. 로저도 그랬어.

 

 

 

 

하루는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만원 버스를 잡아탔어.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어. 멈춰선 창밖 풍경이 와들와들 떨었어.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시커매졌어. 이제 죽는다고 생각했어. 주저앉았고 승객들이 놀라 무어라 말을 걸었는데 들리지 않았어. 떨며 버스에서 내렸어. 정류장에 한참을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어.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어. 버스고 지하철이고 기차고 공원이고 놀이터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어. 결국 병원에 갔어. 의사는 그것이 '공황 발작', 이라고 말해주었어.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지만, 머리는 위험을 직감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지. 생경한 병명이었어. 그 뒤로 로저는 공황장애 환자가 되었어. 몇 가지 어려운 이름을 가진 병들이 뒤따랐어.

 

 

 

로저는 생각했어. '이대로 밖에 나갔다가 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다. 가족들이, 친구들이, 동료들이, 대체 뭐라고 하겠어?' 로저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어. 그래서 나가길 포기했어. 좁고 깜깜하고 아무도 없는 아파트 속에 남아있기를 택했어. 아파트 안이라면 아무도 로저를 동정하지 않았어.

 

 

 

 

그런 로저를 돌봐준 사람이 브라이언이야.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주고. 말보로 레드 보루를 쥐여주고. 오늘 바깥의 공기는 어떠했는지 일러주고. 자신이 지난밤에 꾸었던 꿈 속 풍경을 말해주고. '계절이 지나니까 사람들이 목도리를 하기 시작했어', 같은 비밀을 속삭여주고. 참 다정하게 로저를 챙겨주었어. 그래서 로저는 가족 하나 없어도, 제 아파트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어. 브라이언에게만큼은, 무너진 제 모습을 보여주어도 상관 없었어. 로저가 무너지면 일으켜 주고, 무릎의 흙을 털어줄 사람이었으니까.

 

 

 

 

둘은 매일 통화를 했어. 로저는 집 전화를 썼고, 브라이언은 휴대전화를 썼어. 때는 주로 브라이언이 퇴근한 밤. 어룽진 조명이 상대의 실루엣을 선명히 밝혀. 손 뻗으면, 꼭 잡힐 것만 같은 거리. ‘그렇다고 창밖으로 몸 숙이면 안돼.’ 브라이언의 목소리. 로저가 전화기를 고쳐 들며 물어.

 

 

 

 

/오늘은 어땠는데.

/로즈. 정오에 하늘 봤어?

/아니. 커튼 하루 종일 쳐 놔서.

/하늘 진짜 투명했어. 무슨 새파란 유리창 같았어. 구름도 없고. 일하다가 커피 사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다 한번씩 하늘 쳐다보더라봤으면 좋았을 텐데.

/브리. 내가 보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뭔데?

/. 건너 오면 안되냐. 주말이잖아. 내일.

/지금 가. 조금만 기다려.

 

 

 

 

기다려, 라고 말하자마자 창밖에서 멀어지는 브라이언의 형체. 어떻게 이렇게나 로저 말을 잘 듣는지. 호구 같고 착한 놈이야. 로저는 담배를 빼물어서,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셔. 야트막히 열린 창틈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들. 끊어야지, 하면서도 왜 끊어야 하는데, 하고 되묻게 돼. 브라이언을 기다리는 로저의 머리 위로 도시의 달빛이 떨어져. 로저의 머리를 푸르게 적시며 흘러내리는 빛.

 

 

 

 

담배를 몇 개비나 피웠을까. 두 개비. 세 개비. 다섯 개비. 이러다가 한 통을 다 비우겠다. 브라이언은 줄담배를 태우는 로저를 염려했어. ‘운동도 안 하는데 그렇게 피우면 어떡해?’ ‘운동 하는데. 숨쉬기 운동.’ 로저는 후, , , , 과장되게 숨을 뱉었어. 뱉다가 낄낄대며 브라이언에게 안겨 키스했어. 마주 입맞춤해주면서, 이불 위에 로저를 조심스레 눕혀주던 브라이언. 그런 날도 있었어. 그런 밤도 있었지. 그 기억을 생각하며, 로저는 이불 위에 모로 누워 널 기다렸어. 사랑하는 너가 있다면, 아파트에 갇혀 사는 삶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 로저였어.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또 울렸어. 누군가가 죽거나 무엇인가가 불타고 있겠지. 로저는 담뱃갑을 뒤적였어. 텅 비었어. 그 순간 로저는 깨달았어. '브라이언이 왜 오지 않지? 전화를 끊은 지 얼마나 지났지? 브라이언이 내 집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리지? 이상하지 않아?' 로저는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려 애썼어. '맥주라도 사오는 중이겠지. 아니면 갑자기 집 청소를 하고 싶어졌다거나. 뭐 음식을 해 가지고 올 수도 있어. 설마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있는 거 아냐. 안 어울리게 귀여운 짓도 하잖아, .' 하지만 생각을 할수록 불안은 커졌어. 로저는 제 왼손바닥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어. 눈을 질끈 감았어. 담배를 또 물었다가 두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려놓았어. '어떡하냐. 진짜.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로저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생각을.

 

 

 

 

이제 알았어. 족히 두 시간은 지났을 거야. 로저는 발딱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어.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고, 앞 동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어. 브라이언의 집도 마찬가지였어. 울음이 나올 만큼, 새카만 도시의 밤이었어. 로저는 이를 꽉 깨물었어. 너무 큰 힘을 주고 다물어서, 잇몸이 아릴 지경이었어. 로저는 제 안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어. 그렇게 한참을 빛바랜 샷시를 쥐고 서 있었어. 그러다 보니 창틈으로 새벽이 파고드는 시간이 되었어. 아파트에 걸려 있던 초승달은 얄팍하게 흐려지고, 별들이 구름 너머로 물러서고, 세계가 천천히 밝아지고. 그렇지만 로저는 잠들 수 없었어.

 

 

 

 

사랑하는 네가 오지 않잖아. 어떻게 잠들 수 있겠니. 어떻게 꿈자리에서 뒤척일 수가 있겠니.

 

 

 

 

로저가 이 아파트에서 듣는 소리는 제한되어 있어. 브라이언의 목소리. 전화벨 소리. 초인종 소리. 사이렌 소리. 가스검침원의 발소리(그 사람이 문을 두들기면 언제나 쥐죽은 듯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리고 아파트 안내 방송. '우수관이 얼었으니 세탁기를 돌리지 마세요.' '수도관 점검으로 단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런 내용이었지. 하지만 가끔은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었어. 'K동 앞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였으니, 부디 주민 여러분께서는 교통 안전에 주의를.' 도로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아파트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던 차들이 서로 부딪히는 일이 흔했어. 가끔 그 차들은 사람과도 부딪히곤 했어. 한번은 일 톤짜리 트럭이 일곱 살짜리 어린애를 짓밟은 사고도 있었어. 끔찍하다고 로저는 생각했지. 역시, 바깥은 위험하다니까. 그 위험한 바깥 어딘가에 브라이언이 있는 게 틀림없었어. 이렇게 오지 않는 건 틀림없이 사고 때문이겠지? 경미한 사고였다면 즉시 로저한테 전화했을 텐데.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냐.

 

 

 

 

하면서 머쓱하게 웃어줄, 로저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일 브라이언이었을 텐데. 로저는 브라이언의 마지막 말에 대해 생각했어. '지금 가. 조금만 기다려.' 조금이 아니잖아. 한참이잖아. 로저는 벌벌 떨기 시작했어. 브라이언에게 건너오라고 했던 건 자신이잖아. 그것 때문에 브라이언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떡해. '씨발 니가 없으면 나는 안 된단 말이야. 이렇게 좆된 인생에 남은 건 너밖에 없단 말이야. 내가 이 방에서 꿋꿋이 살아나가는 이유는 오직 너 때문이란 말이야. 이 멍청한 곱슬머리. 평생 이 네모진 아파트 안에서, 닐 기다리기만 하라는 거야?' 로저는 불안했어. 불안해서 연기 탓에 누렇게 변한 벽에 기대, 담배를 또 피웠어. 담배갑을 몇 개는 비워야 올 셈이지, 너는.

 

 

 

 

그리고 로저는 깨달았어. 기다려봤자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기다려봤자 이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직접 보아야겠다. 직접 네 아파트 문을 두들기고, 직접 단지 안을 돌아다니고, 그렇게 해서라도 너의 흔적을 쫓아야겠다. 그리고 발견하면 어깨를 탈탈 흔들 것이다. '이 개새끼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하고 물을 것이다.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질렸다.

 

 

 

 

사랑하는 브라이언. 로저는 너를 찾으러 갈 거야. 더 이상 아파트 그늘에 갇혀 있지 않을 거야. 햇볕 아래든 그림자 아래든 별빛 아래든 꼿꼿이 걸어갈거야. 그리고 너를 찾아내서 꼭 말할 거야. '밖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지?' 그럼 너는 웃어줄 거야. 멀쩡하고 말간 얼굴로 웃어주며, 천천히 말할 거야. '잘했어. 너는 나의 자랑이야, 로저.' 그 말을 듣고 로저는 오랜만에 행복할 거야. 그렇게 믿어. 그러니까 죽어 있지 마.

 

 

 

 

로저는 숨을 내쉬었어. 문 손잡이를 붙들었어. 삼 년 만이었어. 삼 년 만에, 드디어, 밖으로. 바깥의 브라이언에게.

 

 

 

 

 

열병을 앓는 사람의 머리맡엔 편지를 두고 가라는 처방

 

* 등대지기 브라이언.

* 몸이 아파 바닷가로 내려온 로저.

* 바닷가에 띄운 병편지를 받아든, 로저.

 

 

 

 

 

 

 

 

로저는 오래 아팠고 그래서 바닷가로 내려왔다. 수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은 질문과 너무 많은 해답들이 있었다. 로저는 그 복잡함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바닷가 근처에 쓸쓸히 선 로저의 집. 간혹 가다 먼 해양으로 향하는 배들을 목격할 따름이었다. 그 배들의 행선지를 지정해주는 곳은 단 하나, 외딴 등대였다. 로저의 집에서 조금 걸어 나와 모래사장에 도달하면, 간신히 등대의 형체가 보였다. 가끔은 안개에 젖어 흐릿했으나 언젠가는 선명했다. 그 새하얀 몸체를 로저는 오래 보았다. 저 등대에는 사람이 살까, 라고 생각했다. 물론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다.

 

 

 

 

겨울이었다. 로저는 여유가 되어 겉옷을 싸매고 바닷가로 나왔다. 그때 발견한 것이었다. 파도에 밀려온 병을. 로저는 모래에 반쯤 파묻힌 그것을, 한참 굽어보았다. 코르크마개로 입구가 꽉 조여져 있었고, 건조하고 투명한 내부에 노오란 종이 한 장이 말려 있었다. 로저는 병을 집어들었다. 외부는 축축하고 미역 줄기가 감겨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병 편지라는 것일까? 로저는 기뻤다. 오랜만에 신이 났다. 의외로 로저 테일러는 작은 것에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수도의 큰 것들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로저는 웃었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밀어 넣었다. K부두라면 바로 이 근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항상 실루엣만 지켜보던 등대의 사람이 보낸 편지일 것이 분명했다. 그 편지는 먼 태평양을 헤엄치지도 못하고 이곳에 정박했다. 무언가 저에게 찾아온 커다란 행운 같아서, 로저는 조금 들뜬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내일이면 그 등대에 찾아가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가서 무엇을 말할지 한밤 내내 생각했다.

 

 

 

***

 

 

 

 

첫만남은 조금 서툴렀다. 로저는 브라이언에게 제가 받은 편지를 내밀었다. 브라이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로저가 바라본 등대지기의 첫인상은 마르고, 키가 크고, 머리가 덥수룩한 사람이었다. 등대지기라 해서 좀 괴팍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통성명을 했고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종종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친밀해졌다. 어느날 로저는 턱받침을 하고 브라이언에게 말했다.

 

 

 

나는 마지막 기대도 다 포기하고 여기 왔는데, 당신을 만났어.”

듣기 좋은 말이군요.”

세상 끝 등대*에서 당신을 마주친 기분이야.”

그래서 좋은가요?”

.”

 

 

 

로저는 킥킥 웃었다. 그들이 함께 지켜보는 바다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로저가 속삭였다.

 

 

 

어쩌다 여기에서 일하게 된 거야?”

처음에는 우주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쪽 공부를 하다가 어떻게 살다보니.”

나도 어떻게 살다보니 여기로 왔는데.”

사는 게 다 그렇죠, .”

 

 

 

브라이언과 함께 있으면 실없이 웃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로저는 자신의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아침에는 일어나서 연신 기침을 했는데, 티슈에 혈흔이 묻어나올 때가 있었다. 로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브라이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참고로 전염되는 병 아냐.”

그런 게 대순가요.”

 

 

 

브라이언이 천천히 로저를 끌어안았다. 로저는 처음으로 그에게 안겼다. 사람의 온기를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았다. 로저가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꽤 이름 날리는 아는 가수였어.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전국민이 아는 건 아니지만, 한 사분의 일 정도는 아는 수준. 놀랐지? 당신은 공부를 하느니 바다를 보느니 하면서 TV라고는 켜 보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유명하고 돈도 꽤 벌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 싫은 거야. 내 주변에 내가 감당하기 힘든 종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외롭다고 한 당신한테, 이거 참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지? 그렇게 사람이 싫어진 김에 몸도 아프더라고. 그래서 여기로 도망쳐왔어.로저의 말을 들으며, 브라이언은 천천히 로저의 금발을 쓸어주었다. 힘없는 머리카락이 브라이언의 손길에 맞춰 여기저기 쓸렸다.

 

 

 

연애하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연애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로저는 브라이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잠깐은 자리를 비워도 되잖아. 로저는 사정했고 브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K항구는 이미 산업체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노쇠한 항구였고, 드나드는 배도 별로 없었던 탓이었다. 로저의 집에서 그들은 샴페인을 땄고 와인을 기울였고 블루스 음악을 틀었다. 브라이언이 듣고 싶다고 해서, 로저가 활동하던 곡도 틀었다. 로저는 민망해했다. 브라이언은 듣기 좋은 곡이라고 말했다.

 

 

 

몸을 섞은 후에는, 조금 달뜬 상태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로저는 제 기분이 좋은 것이 취기 탓인지 섹스 탓인지 브라이언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열기 오른 숨을 천천히 뱉었다. 브라이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저. 솔직히 믿겨져? 그 편지를 네가 받았다는 거.”

나는 방금 우리가 섹스했다는 게 더 안 믿기는데.”

좋았잖아.”

좋았지.”

 

 

 

로저는 부정할 수 없어서 수긍했다. 브라이언이 큭큭 웃었다. 반쯤 열어둔 창문 너머에서 파도소리가 푸른빛으로 일렁이며 들어왔다. 그 소리를 오래 들었다. 듣다가 잠이 들었다. 로저는 그 날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꿈을 꾸었다. 버스 대신 자가용이 도착했다. 브라이언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멀리, 국경 너머까지 달리는 꿈이었다.

 

 

 

***

 

 

몸상태가 좀 나아졌대. 신기하지?”

다행이야.”

 

 

 

오랜만에 수도에 다녀온 로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침마다 기침 하는 것도 멎었고, 저혈압 때문에 눈앞이 깜깜해 쓰러지는 일도 줄어들었다. 로저가 털어놓은 사실을 듣고 브라이언도 기뻤다. 사실 로저의 병명에 대해 몰래 찾아본 적 있었다. 완치율이 고작 이십 퍼쎈트에 불과했다. 그래서 정말 염려하고 있었는데, 나아가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말라빠진 등을 평소보다 더 오래 끌어안았다. 로저의 몸에서는 오월의 햇볕 냄새가 났다.

 

 

 

등대지기란 직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기계가 발달하고 있는 시대였고 사람의 자리는 기계로 대체가 가능해지고 있었다. 등대를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브라이언은 등대를 떠나는 것을 권유받았다. ‘당장은 아니고 이년 정도 후에.’ 그것은 예의 바른 사직 권고였다. 그 소식을 듣고 브라이언은 며칠 내내 쓸쓸했다. 하지만 건강 탓에 들떠하는 로저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브라이언에게 로저는 그만큼 커다랗고 소중한 이가 되어 있었다.

 

 

 

연애를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났고, 일 년이 다 되어갔다. 로저가 어렵게 말했다. '앨범을 다시 내보지 않겠냐고 제안받았어. 다시 일할 때가 된 것 같아. 여기 정리하고, 수도로 돌아가려고.' 이별은 그렇게 통보하듯 찾아왔다. 로저는 미안해했으나 브라이언은 그를 축복했다. '지금까지 곡이 좋았으니까 다음 곡은 더 잘 될 거야.' 브라이언의 말에 로저는 울음을 터뜨렸다. 로저의 긴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브리, 여길 같이 떠날 생각은 없지?”

. 나는 아마, 평생 여기에서 살 것 같아.”

보고 싶을 거야.”

보고 싶을 거야.”

가끔 찾아올게, 브리. 그때까지 여기 있어야 해.”

기다릴게, 로저.”

 

 

 

기다릴 수 있을까.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이 바다를 떠나 있지 않을까. 로저의 차가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 국도의 끝을 상상했다. 로저는 수도에서 다시금 빛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 그렇게 빛날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그렇게 브라이언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 슬프지는 않은 이별이였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이별도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둘은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내 외로움을 거두어가주어서 고맙다'는 그 마지막 말을, 브라이언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품어두기로 했다. 때로는 하지 못한 말이 했던 말보다 더 커다란 무게를 가지는 법이었으니까. 바다는 계속해서 일렁였다. 바다는 전생의 비밀을 품고 있기라도 한 듯이, 내내, 수 세기 동안, 그렇게 흔들릴 것이었다. 다시, 겨울이었다.

 

 

 

 

 

 

*세상 끝 등대: 시인 박준의 시 제목

 

 

 

 

 

 

해독 불가능한 당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쓰는 봄밤

 

 

* 재개발 직전의 T지구.

* 학생회장 브라이언. 브라이언이 챙겨주는 가난한 로저.

* 열여덟에서 열아홉까지.

 

 

 

 

 

S#1.

 

* 시간: 200X1027() 오후 520.

 

* 장소: 재개발 대상 T지구. 오물이 가득한 하천이 T지구를 감싸고 흐른다. T지구는 도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날이 갈수록 성장세를 이룩하는 도시. 공무원들의 눈에 T지구는 볼썽사납다. 그래서 밀어내기로 결정한다. 시청이 결정하자 사기업이 수주권을 따내고 고용된 용역들에 의해 주민들은 쫓겨난다. 주민들의 반대는 모기 소리처럼 약하다. 주민들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집들도 안개처럼 스러진다. 골목골목마다 가로등 불빛만이 글썽거린다. 그곳에 로저 테일러의 방이 있다.

 

 

 

로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열여덟의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아비가 먼저 떠났고 그 뒤로 어미도 떠났다. 그들을 한사코 붙잡으려고 애썼지만 소낙비처럼 떠나갔다. 때문에 로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다짐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절망뿐. 절망을 이기지 못한 로저는 오늘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날 담임이 묻겠지. '로저, 어제 아팠니?' 그 동안 로저는 문제없이 학교를 다녔다. 아마도 담임은 그의 상태를 염려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담임이 로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잖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로저는 생각한다. 그래서 담배만 뻑뻑 피운다. 담배를 너무 피운 나머지, 방 안의 벽지는 원래 아이보리빛이었는데 누렇게 떴다. 골목 사이로 까만 얼굴을 한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절망이 섞여 집집마다 들어간다. 멀리서 주택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곧 방을 빼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철문을 탁탁 두드린다.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고용된 폭력배들인가? 그런 이들이 자주 집에 찾아온다. 몇 대 맞아주면 그만이다. 로저는 문을 연다.

 

 

 

낯선 그림자. 누구? 의문을 가졌던 로저는 이내 답을 얻는다. . 브라이언 메이.

 

 

 

"뭐냐. ."

"밥 사왔어. 오늘 학교는 왜 안 온 거야?"

"내가 거지처럼 보여?"

 

 

 

로저는 브라이언을 노려본다. 재수없는 새끼. 모든 것을 가진 새끼들은 다 저렇게 재수가 없다. 대관절 무엇에 꽂힌 건지, 브라이언은 로저에게 몹시 상냥하다. 배를 곯는 로저에게 먹을 것을 사다주고, 과제를 챙겨주고, 하굣길을 함께한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로저가 한참을 물었지만 브라이언은 대답이 없다. 애매모호한 미소만 띨 뿐이다. 로저는 내심 결론 내린다. 이 새끼는 시간이 너무 넘쳐 돌아서 나를 돕는 것이다. 그 태도마저도 재수가 없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동의를 얻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로저에게는 친구가 없다.

 

 

 

브라이언은 수제버거 세트를 사들고 왔다. 맥도날드 같은 싸구려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분명히 한 접시에 최저임금 두 배는 넘는 비싼 버거다. 로저는 싫은 내색을 마구 내비치면서 그것을 베어 문다. 촉촉한 패티의 육즙이 입가에 흐른다. '천천히 먹어. 콜라도 마시고.' 브라이언이 티슈로 로저의 입가를 닦아준다. 다섯 살짜리 애새끼가 된 기분. 로저는 조금 수치스러워서 브라이언을 노려다본다. 로저가 식사를 다 해결할 때까지 브라이언은 방을 떠나지 않는다. 가만히 로저를 바라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거나, 나른히 기타를 친다. 참고로 브라이언은 밴드부에서 기타도 친다. 정말 너무할 정도로 재수가 없지 않은가. 로저가 식사를 해결하고 나서야 브라이언은 방을 떠난다. 문을 닫기 전, 브라이언은 뒤돌아 말한다.

 

 

 

"내일은 학교 와."

"꺼져버리기나 해."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로저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들의 사이는 무엇인가. 이상한 관계다. 친구인가? 친구가 보통 이러한가? 로저는, 브라이언 메이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로저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냥 재수 없는 새끼다. 평생.

 

 

 

 

***

 

 

 

 

S#2.

 

* 시간: 200X1029() 오후 730.

 

* 장소: T고등학교. 본관 3. 음악실과 복도. 교사들은 모두 퇴근했고, 학생들도 얼마 안 남은 상태. T고는 야간 자율학습을 운영하지 않는다. 엉망인 학교다.

 

 

 

 

이틀 전의 무단결석 때문에 로저는 음악실 청소를 도맡게 된다. 온갖 불평을 하며 음악실 자재들을 밀고 쓸고 닦는다. 복도 건너에서 또각또각 학생화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음악실 문은 절반 정도가 탁한 유리로 되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다. 로저는 숨죽이고 넘겨다본다. , 또 브라이언 메이다. 브라이언 메이와 여자애. 여자애의 이름은 모르지만 브라이언과 같은 학생회. 둘이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며 웃고 있다. 브라이언의 얼굴에 띤 웃음은, 로저에게 항상 보여주는 종류의 미소와 비슷하다. 로저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항상 성을 내고는 하지만, 조금 안심이 되긴 하는 것이다.

 

 

 

집까지 들어줄게.”

아니야. 별로 안 무거워.”

오늘 너가 애썼잖아. 그 정도는 도와주게 해줘. 샬롯.”

좋아. 허락할게. 우리 집, 어딘지 알지?”

 

 

 

여자애가 청사과를 깨문 듯 맑은 웃음소리를 낸다. 사랑스러운 여자애다. 여자애의 느린 걸음에 맞춰 일부러 천천히 떼는 브라이언의 보폭은, 누가 봐도 다정하다. 로저는 마음이 조금 울렁이는 것을 느낀다. 지금껏 로저는 철썩같이 믿어왔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만 잘해주는 것이라고. 헌데 그것이 아니었다. 브라이언은 모든 이들에게 상냥한 것이다. 아무한테나 친절한 브라이언. 지옥이 되어가는 로저의 마음. 하지만 로저는 자신이 마음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싶지 않다. 인정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로저의 마음에는 자존심뿐이 살고 있다. 브라이언과 여자애가 멀리 복도를 돌아 사라진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로저는 황급히 금발 머리를 흔들어댄다.

 

 

 

게다가, 로저는 믿고 있지 않았던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그건 브라이언 메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울렁이는 심장을 꾹꾹 누르듯이, 로저는 새까매진 손걸레를 꾹꾹 누른다. 커튼이 쳐진 컴컴한 음악실에서 홀로 한참을 있었다. 솔직히 외로워졌다.

 

 

 

 

***

 

 

 

 

 

 

***

 

 

 

 

S#3.

 

* 시간: 200X117() 오후 825. 이 시절에 떠도는 바람은 몸을 아프게 한다.

 

* 장소: T지구의 버려진 공사장. 이곳은 위협적이다. 양아치들과 폭력배들과 날라리들과 폭주족들이 점거하고 있다. 그러니 경고: 혼자 다니지 말 것.

 

 

 

 

로저는 친구가 없기 때문에, 혼자 다닌다. 혼자 다니는 예쁘장한 로저를 위협하는 녀석들은 많다. 다들 양심이 없는 놈팽이들. 하지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영리한 로저는 위협적인 상황을 잘 피해 다녔다. 하지만 오늘은 글러먹었다. T고에 다니는 같은 학년의 양아치들이다. 숫자는 다섯, 아니, 여섯?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로저는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칠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뒷걸음질치다가 쇠파이프 더미에 등을 부딪힌다. 아픈 기색을 내지 않으려 로저는 최선을 다해 참는다. 녀석 중 하나가 불쾌하게 킥킥거린다.

 

 

 

테일러. 담배 한 대 줄까?”

꺼져. 니네 던힐 피잖아.”

편하게 있어. 편하게. 에디, 이 새끼야. 너 말보로 하나 없냐?”

나 집 갈 거라고.”

 

 

 

로저의 선언에 녀석들 전부가 킥킥거린다. 한 녀석이 로저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그 손을 밀쳐낸다. 로저는 아버지에게 뺨을 후려맞았던 일을 생각한다. 이내 로저의 뺨으로 손이 날아든다. 아픈데 아프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로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욕하고, 노려보고, 발을 구르고, 뭐 그 정도다. 이 정도면 미약한 반항이다. 얼굴을 맞고 배를 걷어차이고 허벅지에 멍이 생긴다. 씨멘트 바닥에 뒹구는 로저를 내려다보며 제임스, 라는 녀석이 말한다.

 

 

 

너는 맞아도 이쁘장하다. 처음엔 키 큰 기지밴 줄 알았는데.”

니네 좆같다.”

한 번 대주면 이제 좆같이 안 굴게.”

 

 

 

와르르 터지는 웃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로저. 먼지투성이 금발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 로저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발걸음. 우뚝 멈추는 제임스 자식의 손짓. 과연 누가 찾아온 것인가? 양아치들의 머리 위편에 있는 용역 깡패들인가? 목소리를 들으니 그것도 아니다. 로저는 대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약간 안심이 되면서도, 도망치고만 싶다.

 

 

 

제임스. 경고 한 번만 더 축적되면, 이번에야말로 퇴학 처분 받지 않던가?”

그걸 니 새끼가 어떻게.”

경고 처리를 하는 게 나니까? 학생회가 왜 좋겠어.”

 

 

 

브라이언은 상냥하게 웃는다. 제임스가 브라이언의 발치에 침을 뱉는다. 놀랍게도 브라이언은 주먹 하나 휘두르지 않아도 녀석들을 쫓아낼 힘을 가지고 있다. ‘테일러 좀 내버려 둬.’ ‘얘가 니 깔이라도 되냐?’ ‘아니.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 로저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서 브라이언의 말을 되풀이한다. 그냥 친구. 그래. 이 재수없는 새끼야. 우리는 그냥 친구지. 내가 양아치들한테 두들겨 맞고 있을 때, 데리러 와주는, 그냥 친구. 아무리 맞아도 눈물 한번 안 보이는 로저, 괜히 눈시울이 화끈거린다. 양아치들이 물러선다.

 

 

 

로저는 겨우 씨멘트칠 바닥을 디디고 일어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분명 온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브라이언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로저의 어깨에 덮어준다.

 

 

 

추운데 왜 코트도 안 입고 나왔어?”

나 코트 없어. 새끼야.”

하나 사 줄게.”

됐다.”

 

 

 

동정하면 죽여 버릴 거야, 브라이언 메이.’ 로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곧 로저는 깨닫는다. 로저 정도의 처지면 누구에게나 동정받는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한테 동정받는 기분은 비참하다. 당해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

 

 

 

 

S#4.

 

* 시간: S#3와 거의 동일.

 

* 장소: T지구의 골목길. 불가피하게, 로저 테일러는 여전히 T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브라이언은 고민한다. 오늘은 로저에게 저녁으로 무엇을 사다주어야 할 것인가. 시간은 일곱시를 훌쩍 넘겼으나, 분명 로저는 저녁조차도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로저에게 잘 들어맞는다. 부모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예민하고 귀여운 남자애. 브라이언 메이는 그러한 로저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열여덟살에게는 너무 과분한가? 그렇다면 좋아한다고 수정하자. 로저 테일러를 좋아하는 브라이언 메이. 오늘도 로저의 식사를 사서 천천히 걸어간다.

 

 

 

처음 좋아하게 된 순간을 브라이언 메이는 똑똑히 기억한다. 일학년 첫날. 알 수 없는 환희로 부산했던 복도. 복도 한편에 잔뜩 경계의 눈빛을 세우고 있던 금발머리 하나. 브라이언은 무심히 그 애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그 애. 맨 처음 대화에서 이름을 물었었지. 아마?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하게.”

3반 아닌가? 나도 3.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로저. 이름 잘 어울리네.”

왜 뜬금없이 친한 척인데.”

 

 

 

로저는 금세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 애는 느끼는 바가 얼굴에 잘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그 작은 제스쳐들이 사랑스러웠고, 브라이언 메이는 이내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일 년이 지나고 또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저녁을 챙겨서 그 애의 좁은 방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T지구를 샅샅이 뒤지는 중이다. ‘로저 테일러!’ 큰 소리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곳곳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대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쏘다니다 말고, 공사장에서 그 애를 발견한 것이다.

 

 

 

브라이언의 눈에 로저는 가엾다. 특히 저렇게 맞고 있는 모습은 더 가엾다. 브라이언은 다가갔고, 아무 무게도 실려 있지 않은 경고를 했는데, 양아치들은 제뿔에 놀라 달아난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말라 비틀어진 어깨에 제 외투를 걸쳐준다. 그 어깨를 한참이고 안아주고 싶다. 근데, 그러면 로저는 놀라 도망칠 것이다. 아마 도시 끝까지 도망치고 국경 끝까지 도망치고 우주까지 도망쳐버릴 것 같다. 예민한 로저는 천천히 아껴줘야 한다. 그래서 어깨에 가만히 코트를 얹어주는 일에만 겨우 만족한다.

 

 

 

그렇게 둘은 함께 로저의 집으로 돌아간다. 타박타박 걸음소리. 가로등 불빛이 낭자하게 골목에 드리워진다. 두 그림자가 버려진 길가에서 위태하게 흔들린다. 절망을 숨긴 바람은 꽤 차다. 비로소 늦가을이다. 로저가 문득 말한다. 그 애의 목소리가 살폿 떨리는 것이, 추워서인지 아니면 긴장해서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니는 왜 나한테 잘해줘.”

친구니까.”

지랄. 닌 모든 애들한테 다 잘해주면서.”

너한테만큼은 안 그래.”

 

 

 

괜히 성을 부리는 로저. 로저의 속내를 브라이언은 파악할 길이 없다. 하지만 화를 내는 로저는 사랑스럽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건 귀여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브라이언은 피식 웃어버린다. 로저가 브라이언을 쏘아본다. 그러면서도 어깨에 걸쳐진 브라이언의 코트를 제 몸에 꼭 감싸 안는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다. 멀리서 T지구를 감싸는 하천이 불길하게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천에서의 고약한 악취 탓에 얼굴을 찡그리는 로저. T지구의 야경은 형편없다. 이 형편없는 거리. 둘은 걷고, 또 걷고. 로저의 방에 도착하는 길은 멀다.

 

 

 

저녁 다 식었겠다.”

뭐 사왔는데.”

샌드위치하고 밀크티.”

밀크티? 존나 뜬금없네.”

조심히 들어가. 내일 학교 꼭 오고. 그리고, 로저.”

?”

, 너한테 잘해주는 거, 꼭 습관 같아.”

 

 

 

브라이언은 당황한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모른다. 로저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것이 저의 의도치 않은 고백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브라이언. 얼굴이 붉어진다. 숨기려고 고개를 위쪽으로 쳐든다. 로저는 브라이언보다 키가 작아서, 붉어진 브라이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로저가 이내 픽 웃는다. ‘습관 한번 좆같은 거 가지고 있네.’ 로저의 말에 브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내린다. 가로등 불빛에 휘날리는 로저의 금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장소와 너. 브라이언이 한숨을 쉰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브라이언은 입을 연다.

 

 

 

로저, 우리, 연애해볼래?”

 

 

 

***

 

 

 

 

S#5.

 

* 시간: 200Y423일 일요일 오전 1125. 당신은 봄볕이 드는 이 시간을 사랑하는가?

 

* 장소: T지구의 천변(川邊). 천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재개발이 중단되었고 겨우내 깨끗해진 하천. 그러나 여전히 인적은 드물다.

 

 

 

 

 

꽃 보러는 처음 와 보는데, 여기.”

벚꽃, 너만큼 예쁘다. 로저.”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저기 물에 빠뜨린다. 저기 빠지면 감기 빼고는 다 걸린다는데.”

 

 

 

우스운 열아홉 살의 연애. 로저 테일러는 결국 학업을 중단한다. 대신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다행히, 재개발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방을 빼야 할 위험은 없다. 로저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희망의 내용은 절반이 브라이언 메이다. 브라이언 메이는 학교를 잘 다닌다. 학생회장 임기는 끝났지만 여전히 주목받는다.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을 목표로 두고 있다. 가끔은 브라이언도 불안한데, 그 위독한 불안의 절반을 로저와 해결한다. 그래서, 이 해 드는 오전에 함께 천변을 걷고 있는 것이다.

 

 

 

좀만 걷다가 점심 먹으러 가자.”

뭐 먹지?”

로저 너 먹고 싶은 거.”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시간. 햇빛의 향이 T지구의 구석구석에 퍼진다. 브라이언과 로저의 세계에 온통 분홍이 스며들고 있다. 브라이언과 로저는 손을 잡는다. 손을 잡고 또 걷는다. 그 수줍음이라니. 그 말간 얼굴을 한 다정함이라니. 그 열아홉이라니. 까마득한 하늘 저편에서, 흰빛 구름이 기억처럼 흘러간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다. 봄이다.

 

 

 

 

 

 

 

Universe Romantica

 

* 빛이 사라진 우주.

* 위기 해결을 위해 파견된 우주비행사, 브라이언.

* 빛, 로저.

 

 

 

 

 

 

빛이 사라졌다. 지구에만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온 우주에서 빛이 실종되었다. 완벽한 밤에 접어들자, 인간들은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컨퍼런스에 모인 사람 중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우주에는 빛이 있습니까?' 그것은 근본적인 질문. 다른 이들이 왁자지껄 답했다. '빛이 있겠지요. 아무렴 어둠뿐이겠습니까.' '아니오. 진정한 의미의 빛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관절 당신이 말하는 진정한 빛이 뭐야?' 그러한 논쟁 끝에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빛을 찾으러 나가야 한다. 그러면 누가 나갈 것인가?

 

 

 

권력 있는 이들이 연구원의 이력에 대해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결정된 사람이 닥터 브라이언 메이였다.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인데 반해 차분하고 이지적인 성격을 가진 그. 명석한 것은 이루 말할 데 없었으며 겸손하기까지. 위쪽 사람들의 눈에 들기 좋은 조건이었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그렇게 우주로 향하게 되었다. 빛을 찾아서. 인류 최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닥터 브라이언 메이를 보조하기 위해 몇 명의 우주인들이 더 붙여졌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어두운 지구를 떠나 어두운 우주로 향하게 되었다.

 

 

 

과연 온 우주 역시 어둠에 절어 있었다. 지구보다도 더한 침묵과 죽음과 고통과 우울의 연속이었다. 동료 우주인들을 모두 잃었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였고, 절망했다. 지구와의 교신도 끊긴지 오래였다. 힘없는 우주선을 타고 홀로 궤도를 돌았다. 어느 날, 눈을 뜬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우주선 밖 풍경을 보고 놀랐다. 과연 이곳은 어디인가? 이렇게 지독하고 황량한 곳은 어디인가? 그는 우주복을 갖춰 입고 내렸다.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건물이 하나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 분명한 건물.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떨어져 나갔으나, 분명 그것은 건물. 건물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인간의 흔적을 의미하지 않던가? 아니, 지구에서 셀 수 없는 광년이나 떨어진 이곳에서? 당장 닥터 브라이언 메이가 떠나왔을 때도, 가장 최신의 기술로 쏘아낸 우주선도 이곳에 겨우 닿았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그보다 먼저 이곳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자신의 학술적 견해에 대해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마주했다. 인간 문명사에서 무엇보다도 찬란한, 빛을.

 

 

 

"당신은 인간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로저 테일러."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브라이언 메이."

 

 

 

황량한 풍경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래바람이 일었고 한쪽에는 거대한 습지가 있었으며 이상한 중력이 인간의 발을 붙들어매는 행성이었다. 이런 곳에, 모든 우주에서 실종된 빛이 있다니, 브라이언은 믿을 수 없었다. 로저 테일러라는 사람은 윤기가 났다. 그의 지나치게 환한 금발을 통해 빛을 목격할 수 있었다. 브라이언은 컨퍼런스에서 권위자들의 대화에 대해 생각했다. '진정한 빛'. 말하자면 브라이언은 그 '진정한 빛'을 목격한 셈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에 빠진 순간과도 같았다.

 

 

 

"로저 테일러. 당신은 이곳에서 어떻게 생존합니까?"

"저만의 방법이 있지요."

 

 

 

로저는 닥터 브라이언 메이에게 건물 안 하나의 장소를 소개했다. 그것은 온실이었다. 쇠문을 힘겹게 열자 습기가 밀려나왔다. 온실 한가운데로 또박또박 걸어간 로저가 피식 웃었다. 놀랐지, 하는 표정이 상당히 개구졌다. 그 얼굴이 참 곱상하다고도 생각했다. 로저는 이곳에서 식물과 식수를 채취한다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셀 수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고 속삭였다.

 

 

 

"여기서 당신은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은 고정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로저 테일러.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자라납니까?”

인간에게만 시간의 멈춤이 선사되었습니다.”

인간에게만?”

.”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어릴 적 들춰보았던 신화에 대해 떠올렸다. 인간이 죽어서 선한 일을 하면 천국이라는 장소에 간다. 그곳에는 뛰노는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다. 천사들과 어울려 죽음 후의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착하게 살자. 그것이 신화의 내용이었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자신이 신화의 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로저 테일러는 일종의 천사인가? 아니, 그는 인간이었다.

 

 

 

 

로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었다. ‘지구에는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세계대전이라고 부르는 그것. 전쟁이 끝난 후 강대국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땅덩어리는 너무도 좁다. 바깥 세계를 찾아 나서자. 그들은 극비로 연구했습니다. 극비의 극비 작전이었습니다. 돈이 수없이 들었고 사람이 수없이 죽었습니다. 그러한 프로젝트였습니다. 결국 우주로 나와 동료들을 보냈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어느 날, 무전 너머로 나는 들었습니다. 실험은 실패했다. 너희에 대한 모든 기록과 기술을 파기하겠다. 미안하다.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여라. 그렇게 나는 우주 한가운데 버려졌고, 이 행성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의 시간은 멈췄습니다.’ 로저의 이야기를 듣고,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그가 좀 가엾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저지른 실험의 순진한 피해자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지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로저에게 우주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로저 테일러. 우주의 모든 빛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빛을 찾아 우주를 가로질러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빛을 발견했습니다.”

로맨틱한 말씀이군요.”

지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지구는 이미 나를 버렸습니다.”

바보 같은 지구군요.”

멍청이들이지요.”

 

 

 

로저는 흐흐 웃었다. 그는 닥터 브라이언 메이에게 행성에서의 숙식을 제공했다. 둘은 함께 빛이 사라진 아득하고 검은 우주를 올려다보았다. 둘은 지구의 미래에 대해 토의했다. 둘은 함께 스크램블 게임을 했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반파된 우주선에서 담배를 꺼내주었다. 로저가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빛나는 로저 테일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저가 그 시선을 의식하고 닥터 브라이언 메이를 빤히 보았다. 둘의 눈빛이 십 초 가량 마주쳤다.

 

 

 

인간이 그리웠어.”

 

 

 

로저가 속삭였다. 둘은 키스했다. 그렇게, '닥터 브라이언 메이'는 그냥 '브라이언'이 되었다.

 

 

 

***

 

 

 

 

***

 

 

시간이 멈춘 채로 살았다. 로저는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혼자 사는 건 외로웠어. 얼마나 외로웠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평생 젊은 채로 산다는 건 기쁘지만 내 젊음을 봐줄 사람이 없잖아. 너가 와 줬어. 브라이언.’ 브라이언은 로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이 지나치게 넓고 황량하고 건조한 우주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로저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로저와 이대로 계속 지내고 싶었다. 사랑하는 빛나는 이와의 영생. 누구나 꿈꾸는 이상일 것이다. 이곳이 천국일까?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어느 날, 그들은 브라이언이 타고 온 우주선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교신 신호가 울렸다. 브라이언은 당황했다. 분명히 지구에서는 몇 년, 아니 몇십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런데 교신이라니? 브라이언은 수락 버튼을 눌렀다. 로저가 불안한 눈으로 브라이언과 교신 기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 살아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빛을 발견했습니까?”

…….”

부디, 부디 빛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오십시오.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어둠에 적응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점점 미쳐갑니다. 서로가 어둠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어둠은 공포만을 가져옵니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 부디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지구로 돌아와 주십시오.”

이곳은 지구에서 아주 멉니다.”

부디.”

……

당신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교신 너머에서 비명 소리와 총소리가 들렸다. 이내 신호가 끊겼다. 브라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저가 대번에 브라이언의 품에 파묻혔다. ‘싫어. 싫단 말이야.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거긴 다 개자식들만 있어. 날 버린 개자식들만 있다고. 싫어. 난 안 가.’ 로저가 브라이언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 로저가 당한 배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브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저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브라이언은 악몽을 꾸었다. 이 행성에 와서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사람들은 광기에 빠져 있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칼을 휘둘렀다. 브라이언의 옛 동료들이 쓰러졌고 가족들이 쓰러졌고 거리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브라이언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로저가 일어나더니, 걱정스러운 손길로 브라이언의 젖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별 거 아냐.’ 로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브라이언은 그렇게 변명했다.

 

 

 

죄책감은 중요한 문제였다. 브라이언은 며칠을 악몽에 시달리다가, 결국 로저에게 털어놓았다.

 

 

 

같이, 지구로 가면 안 될까.”

브리. 그들은 나를 이미 버렸어.”

하지만 너가 그들을 살릴 수 있어. 로저.”

나는 또 이용당할 거야.”

사랑하는 로저. 부탁이야.”

나와 영원히 여기서 사는 걸 포기할 정도로, 지구의 인간들이 중요해?”

 

 

 

로저가 울었다. 로저가 우는 것을 브라이언은 처음 보았다. 브라이언은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로저는 브라이언의 굳은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우주선을 함께 수리했다. 발사체도 함께 완성했다. 그들은 우주선에 올라탔다. 출발했다. 그렇게 영원의 행성을 떠났다. ‘잘한 선택일까?’ 브라이언은 창 밖으로 멀어지는 그 작은 행성을 보며 생각했다.

 

 

 

***

 

 

 

여지없이 인간의 본질은 사악하다. 처음 인간들은 브라이언과 로저를 환영하는 듯 보였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빛을 품은 로저가 돌아오자, 밤을 거둬내고 낮이 찾아왔다. 지구가 다시 밝아졌다. 아름답게 빛나는 로저를 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컨퍼런스가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각국의 권력자들과 재벌들도 모였다. ‘낯선 행성에서 오신 두 분께는 물론 감사하지만.’ 한 사람이 말했다. ‘두 분은 위험합니다. 지구를 떠난 지 몇십년이 지난 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젊을 수 있지요?’ ‘대체 어디 틀어박혀 있다 온 거야?’ ‘설마, 외계인들은 아니겠지요?’ ‘가둬놓고 검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떠들어댔고, 브라이언은 눈을 질끈 감았으며, 로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둘을 분리해서 실험하기로 작정했다. 인간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배신을 하는 존재들이었다.

 

 

 

둘은 그렇게 강제적으로 헤어졌다. 로저가 갇힌 실험실에 사람들-주로 부자이거나 권력자인 남성들-이 찾아와서 흥미롭게 로저를 들여다보았다. 예쁘고 빛나는 실험체가 몸부림쳤다. ‘피실험자가 매우 건강합니다. 한번 손을 대 보시지요.’ 연구원이 권했고, 그들의 손길이 로저의 피부를 어루만졌고, 로저가 덜덜 떨었다. 그런 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로저는 비명을 질렀고 악을 썼고 욕설을 뱉었고 결국엔 강제로 진정제를 맞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브라이언은 실험실의 새하얀 벽을 노려보았다. 여지없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실험실끼리 방음이 덜 되는 듯 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로저가 날카롭게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이언은 다시 악몽에 시달렸다. 이번엔 피에 젖은 거리에, 로저가 혼자 떨고 있었다. 꿈 속의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안아주려고 하면 로저가 도망쳤다. 도망치는 로저를 끝내 품에 끌어안을 수 없었다. 꿈에서 깬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도망쳐야겠다. 지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

 

 

 

브라이언은 실험실에서 탈출했다. 로저의 실험실로 몰래 숨어들었다. 로저의 재갈을 끌러주었다. 로저가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들어 브라이언을 올려다보았다.

 

 

 

도망치자. 로저.”

어디로.”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

어떻게 거길, 다시 돌아가겠어. 멍청한 브리.”

 

 

 

로저가 쓸쓸하게 웃었다. 사실 브라이언도 잘 몰랐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있었던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둘은 손을 잡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구의 거리는 북적이는 인간들로 가득해 있었다. 인간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브라이언과 로저의 눈에, 그들은 모두 악마들이었다. 이곳은 천국이 아니었다. 천국으로 가야만 했다. 이내 경보음이 모든 거리를 뒤흔들었다. 도망친 둘을 찾아내려는 소리였다.

 

 

 

쫓기고 쫓긴 둘은, 도시에서 가장 높다는 빌딩의 옥상에 도착했다. 하늘 끝까지 솟은 빌딩은 바빌론의 탑을 연상시켰다. 그곳이라면 우주에까지 손을 뻗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물 주변의 헬리콥터가 미친 듯이 바람을 실어 보냈다. 저격수들의 붉은 점이 둘 사이에서 어른거렸다. 브라이언과 로저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로저가 브라이언에게 속삭였다.

 

 

 

너 때문이야. 바보 브리.”

미안해. 미안해. 로저.”

쓸데없이 착해서 그래. 너가.”

로저.”

사랑해.”

사랑해.”

 

 

 

그냥 행성에 있었으면 평생을 행복했을 텐데. 그곳이 우리들의 천국이었을 텐데. 지구에서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브라이언과 로저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둘은 키스했다. 아주 진하게. 서로의 입술과 입술을 아주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빌딩에서 아스팔트 바닥까지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 그 무한대의 시간 동안, 둘은 결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음 날,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닥터 브라이언 메이와 빛, 함께 추락사하다.>

 

 

 

***

 

 

 

그들은 꿈을 꿨다. 아주 오랜 꿈이었다. 일어나고 보니, 다시 그 행성이었다. 로저가 잠에 취한 눈을 깜빡이며 브라이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브라이언이 로저의 상체를 안아주며 도닥거렸다. 맞닿은 몸에 다정한 체온이 느껴졌다. 상당히 사랑스러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 행성에서의 매일이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다. 로저가 속삭였다.

 

 

 

나쁜 꿈을 꿨어, 브리.”

나도, 로저.”

꿈이었겠지. 꿈이었어야만 하는데. 설마 지금이 꿈인가? , 꿈꾸고 있어?”

꿈이어도 무슨 상관이야. 지금 우리가 같이 있는데.”

 

 

 

브라이언이 피식 웃었고, 자신의 찬란한 빛에게 키스했다.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묻는다면, 그러니까, 둘만 있는 행성이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대답할 것이다. 사악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지구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 행성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우주에서 이보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공간은 없을 것이라고.

 

 

 

그들의 치열한 사랑의 연대기를 누가 받아쓸 것인가. 이 행성의 존재를 아는 것은,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아는 것은, 서로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셀 수 없는 차원을 거슬러가며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영원한 사랑의 법칙. 우주가 인간에게 선사한 유일한 선물이다.

 

 

 

 

 

 

 

장마의 계절

 

* 피폐 학원물.

* 군림하는 B의 충실한 심복, R. 

* 소재주의.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상극으로 보인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 브라이언은 부자고, 친구가 없다. 로저는 가난하고, 친구가 많다. 친구가 없는 브라이언은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복종 받는 이가 어째서 친구가 필요하겠는가? 반면에 로저는 친구가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기 때문이다.

 

 

 

로저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로저는 재개발지구에 위치한 빌라에 산다. 빌라라고 해 봤자 번듯한 것도 아니고, 방이 고작 두 개. 커다란 방에는 항상 덜 마른 빨래가 걸려 있고, 창문이 깨져 있고, 외풍이 들어오고, 빗줄기가 방 안으로 쏟아진다. 작은 방에는 곰팡이가 가득하고, 빛바랜 분홍 이불이 나뒹굴고, 문짝 하나가 떨어진 장롱이 외로이 서 있다.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어머니는 매우 뒤늦게 귀가한다. 그녀는 로저가 집에서 담배를 피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저를 신경 쓰지 않는다. 어머니와 로저는 완벽한 타인에 가깝다. 로저는 낯선 어머니의 눈빛을 받을 때마다, 방구석의 장롱에 목을 매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들의 연락을 받으면 그래도 살맛이 난다. 그래서 로저 테일러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

 

 

 

오늘도 로저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재개발단지에는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몹시 많다. 그 중 이 층짜리 주택을 선택했다. 로저는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고, 펑크인지 로큰롤인지 정체 모를 음악을 틀었으며, 반쯤 취한 상태로 춤을 추었다. 친구 녀석들이 낄낄거렸고 박수를 쳤다. 밤새 그렇게 놀았다. 로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누군가가 로저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로저가 받아들었다. <브라이언>. 휴대전화에 찍힌 이름에, 로저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취기가 단박에 달아났다. ‘개새끼들아, 음악 꺼.’ 로저의 살벌한 선언에 펑크 음악이 뚝 끊겼다. 로저가 전화를 받았다.

 

 

 

-B.

-어디지?

-애들이랑.

-너 목소리가 취했다.

 

 

 

브라이언이 그렇게 말했다. 로저는 기뻤다. 브라이언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봐 주었기 때문에. 로저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감싸 안았다. 브라이언이 말했다.

 

 

 

-너 취하면 멍청해지잖아. 로저. 안 그래?

-아냐. 지금 다 깼어.

-거기서 계속 재미 보던지, 당장 여기로 오던지.

-으응, 당장 갈게. B. 조금만 기다려.

 

 

 

친구들은 만류하지 않았다. B가 오라고 시켰는데, 감히 친구들과 더 어울리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로저는 재개발단지를 떠났다. 발걸음을 재촉해 브라이언에게 갔다. 인적 없는 골목길이었다.

 

 

 

브라이언은 로저에 대해서 항상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가끔은 로저마저도 헷갈릴 정도였다. 로저는 그저 브라이언의 충실한 심복에 불과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끔 브라이언은 로저에게 더한 것을 바랐다.

 

 

 

-너는 나한테 충성한다면서, 왜 다른 새끼들과 놀아나고 있지?

 

 

 

그것이 브라이언의 의문이었다. 일상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브라이언은 주로 자신의 부모와 충돌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성질을 부렸다. 그러면 로저가 빌고 또 빌어야 했다.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것밖에 없었는데도. 로저가 그에게 비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브라이언의 허리춤 지퍼를 풀고, 입으로 그 짓을 해주는 것. 로저는 골목길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브라이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브라이언의 시선 속에서 네온싸인 불빛이 울렁였다. 멀리서 지하철이 이동하는 괴성이 들렸다. 로저의 머리채가 브라이언의 손에 쥐어뜯길 때면, 이제 끝났다는 신호였다. 로저는 한꺼번에 빨아들였고 브라이언은 로저를 밀쳐냈다. 브라이언이 바지 지퍼를 잠궜다.

 

 

 

-멍청하게 좀 굴지 마, 로저.

-…….

-그렇게 실실대면서 웃고 다니지도 말고.

 

 

 

로저는 뭐라 대답하고 싶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목 뒤편으로 점액질을 넘기느라 힘겨웠다. 뱉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브라이언의 것이니까. 로저가 골목길에 주저앉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브라이언은 또 떠나갔다. 그러면 로저는 또 후회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들의 관계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발전이라고는 없는 사이.

 

 

 

 

***

 

 

 

 

하교할 시간에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세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천둥 소리가 건물에 진동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나온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물기 가득한 복도는 부산했다. 로저는 비가 쏟아지는 것을 내다보면서 좆같다고 생각했다. 내려가서 한 녀석 우산이라도 강탈해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로저 테일러에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로저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과연 많은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 순간, 로저는 보았다.

 

 

 

브라이언이었다. 브라이언은 항상 시커멓고 펼치면 폭이 넓은, 긴 장우산을 썼다. 항상 브라이언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 정도는 알았다. 브라이언은 무언가 상념에 빠져 있는 듯 멈춰서 있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돌렸고 로저와 눈이 마주쳤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손에 우산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을 터인데, 무슨 변덕인지 브라이언이 손을 흔들었다. 로저는 기뻐서 냉큼 달려갔다. 브라이언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야?

-들어와.

 

 

 

처음에 로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 순간 브라이언이 우산을 펼쳤고, 로저의 어깨를 끌어 우산 아래로 밀어넣었다. 로저는 당황했다. 자신의 어깨에 닿는 브라이언의 손길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 무심하고도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손. 브라이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로저는 혼란스러웠다. 왜 얘는 나한테 우산을 씌워주지? 왜 이렇게, 갑자기, 다정한 흉내를 내지? 오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와중에도 기뻤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로저는 수줍게 웃었다. 평소의 로저 테일러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정문에는 브라이언의 차가 멈춰서 있었다. 잘 빠진 검은 세단. 브라이언의 아버지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브라이언은 항상 운전기사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무심히 차에 올라탄 그는, 로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지든지, 버리든지. 맘대로 해.

 

 

 

차가 출발했다. 로저는 자신의 손에 검은 장우산이 들려 있음을 발견했고, 놀랐다. 브라이언의 것이 자신에게 선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저는 떨리는 손길로 우산을 꼭 붙잡았고 아주 천천히 집에 돌아갔다. 습기 가득한 그 거리가 그리도 아름다울 수 없었다. 로저는 괜히 피식피식 웃었다. 브라이언이 붙잡았던 우산을 지금 내가 붙잡고 있다. 변태 같지만 즐겁다. 같은 우산 아래, 같은 우리. 로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혹시, 브라이언도 나를?’ 로저는 그러한 방식으로 기대하는 것을 즐겼다. 가망 없는 기대라는 사실은, 본인도 잘 알았다.

 

 

 

 

***

 

 

 

 

로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사건이 과거에도 또 있었다. 브라이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본 녀석들은 몇 없다. 웬만한 일에 브라이언은 잘 나서지 않는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저 테일러에 관련한 일이라면 조금 달랐다. 아무리 로저가 강한 싸움꾼이라고 하더라도 로저는 적이 많았다. 하도 많은 녀석들을 개패고 다녀서 그랬다. 로저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녀석도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정도였다. 로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뿌듯했다. 조심하라는 친구들의 주의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한번 깨져 본 새끼들은 쪽팔려서 다신 안 와.’ 로저는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H고 녀석들이 또 지랄이었다. 로저가 혼자 귀가하고 있을 때 목각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로저는 욕설을 뱉다가 린치당했다. 여섯 명 대 하나.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친구가 두려워하며 브라이언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테일러가 위험해.’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 녀석은 브라이언에게 직접 전화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내 답장이 돌아왔다. ‘위치가 어디라고?’ 녀석은 성실히 답장을 써서 보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이언이 도착했다.

 

 

 

그렇게 폭력적인 브라이언의 모습은 흔치 않았다. H고 녀석들이 들고 있는 건 고작 야구방망이나 목각 같은 것이 전부였다. 브라이언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벽에 기대어 세워진 낡은 삽을 발견했다. 브라이언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삽을 어루만졌고, 손에 쥐었다. 이내 한 녀석의 어깨에 대고 그것을 내리쳤다. 삽에 찍힌 자리에서 선연한 피가 흘렀다. 녀석이 부들부들 떨었다. 브라이언이 자세를 낮추고, 피를 흘리는 놈에게 속삭였다.

 

 

 

-내가 왜 테일러를 신경 쓰는 줄 알아?

-…….

-내 아래 있는 새끼들 중에, 제일 똑똑하고, 제일 멍청하거든.

 

 

 

H고 아이들은 브라이언의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읽었다. 살의였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녀석들. 두려워하며 단박에 내뺐다. 브라이언이 비웃었다. 로저를 내려다보았다. 로저는 바닥에 쓰려져 기침을 연신 뱉고 있었다. 삽을 끌고 다가오는 브라이언을 보면서, 로저는 환희에 젖었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 저 정도로 간지 나는 줄은. 브라이언은 친히 로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저는 영광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자세를 일으켰다.

 

 

 

-뒤통수에도 눈 달고 다녀. 테일러.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브라이언의 말투. 하지만 로저는 그의 작은 언사에도 너무도 기뻤다. 무엇보다 저를 위해, 브라이언이 친히 달려와 준 것이 몹시 감격스러웠다.

 

 

 

그 뒤로 로저 테일러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녀석들은 몇 없었다. 브라이언의 행동이 와전되고 과장되어 퍼졌기 때문이었다. H고 녀석 하나가 걔 삽에 찍혀 죽었대. 그런데 메이네 아버지가 돈으로 어떻게 덮었대나봐. 그 새끼한테 밉보였다가 진짜 죽는 건 일도 아니겠어. 무시무시한 새끼, 브라이언 메이. 브라이언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명성을 축적했다. 하지만 그 사이 로저 테일러의 애정까지도 쌓이고 있다는 걸, 브라이언은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

 

 

 

 

지금의 상황은 이러했다. 로저 테일러는 브라이언 메이를 사랑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로저 테일러에게 자꾸 착각할 만한 여지를 남긴다. 로저 테일러는 마음껏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 망상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로저 테일러는 운다. 브라이언 메이는 아직까지 우는 로저 테일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브라이언 메이는 여전히 무심하다. 그들의 생은 그러한 방식으로 굴러간다. 이거야 말로, 엉망인 인생.

 

 

 

청소년기의 사랑이 이렇게 힘든 것이던가?’ 로저는 종종 생각한다.

 

 

 

 

 

 

 

 

 

 

 

장마의 계절

 

* 피폐 학원물.

* 군림하는 B의 충실한 심복, R. 

* 소재주의.

 

 

 

 

 

 

어머님. 로저가 친구들을 너무 괴롭혀요.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로저는 무료했다. 이미 수백, 수천 번 겪은 상황이었다. 담임의 말에 로저의 어머니는 몇 번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 자신의 삶부터가 고되다. 로저는 천천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 이른 비가 무심히도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가 창문에 올곧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그 풍경 너머에서, 로저는 브라이언을 발견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검고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서,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도 브라이언의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브라이언.

 

 

 

브라이언이 교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저는 씩 웃으며, 그에게 손키스를 날렸다. 창 너머로, 빗줄기 너머로, 로저의 키스가 닿기는 한 것일까? 브라이언은 로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로저는 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내 브라이언이 시선을 돌렸다. 로저는 잔뜩 아쉬워졌다. 브라이언은 떠나갔으나 로저는 물웅덩이가 고이는 운동장을 한참이고 내려다보았다. '로저, 집중 좀 해라.' 낭만을 깨뜨리는 담임의 말. 로저는 담임을 한 대 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

 

 

 

학교에서는 피해야 할 부류가 있다. 눈 마주치면 좋은 꼴 못 보는. 로저 테일러가 그 영역에 속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름을 날렸으며, 입학식에서 건방지게 군 삼학년 선배의 복부를 걷어찼고, 그런 식으로 전교에 알려졌다. 그야말로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어디서 온지 모를 악바리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악력이 엄청나게 강한 것도 아니었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 기질 때문에 결코 싸움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잘생겼고, 싸움 잘하고, 다소 무서운 편이고. 그런 로저 테일러에게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이라고 하기엔 그 녀석들이 일방적으로 납작 엎드리는 편이었으나 어쨌든 친구들이었다. 로저와 친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안팎을 쏘다녔다. 선생들도 그들 무리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엄격하게 통제하기엔 그들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로저, 오늘은 브라이언이 시키는 거라도 있었어?

-삼학년 육반. 제임스, 뭐라던데.

-걔가 왜.

-B 면전에 대고 웃었대나.

-미친놈이네.

 

 

 

미친놈.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브라이언의 얼굴 앞에 대고 웃다니. 삼학년 씩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학교의 규칙을 모른단 말인가? 맞아도 쌌다. 브라이언의 명령을 직접 하달 받는 사람은 로저뿐이었다. 로저가 그 명령을 친구들에게 전했고. 브라이언에 대한 반항의 불꽃은 금세 사그라들곤 했다.

 

 

 

소각장 바닥에 담배꽁초를 떨어뜨렸다. 로저는 결코 담배를 비벼 끄지 않았다. 불이 나든 말든 무슨 상관? 제 소중한 아이다스 운동화-물론 누군가의 운동화를 강탈한 것에 불과하지만- 바닥에 담뱃재가 한참 묻는 것보다는 나았다. 로저가 일어서자 모두가 우르르 따라 일어섰다. 로저는 만족스러웠다. 삼학년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평하고 무료한 늦봄 오후. 자극제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관절 브라이언 메이, 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그의 경력은 대략 이러하다. 학생회장. 이과 전교 일등. 밴드부 리더. 방송부 부원. 유명 기업가의 아들. 188cm의 키. 꽤 다정해 보이는 성격. 누구라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선생들은 그를 사랑했고 학생들은 그를 존경했다. 홀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옆얼굴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차마 말 붙이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럴수록 모두가 브라이언 메이를 받들었다. 스스로 존경을 끌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브라이언이 그랬다.

 

 

 

로저가 교실 문을 열었고 브라이언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안녕, 브라이언.

-테일러.

-둘만 있는데 좀 상냥하게 불러주면 안 되나?

-학교잖아. 듣는 귀는 많아.

 

 

 

브라이언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제 몸을 기대며, 로저의 몸을 훑어보았다. 로저만치 브라이언의 충실한 심복도 없었다. 누가 보면, 로저가 브라이언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았다. 사실 어느 정도 약점을 잡힌 것은 사실이었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이름의 약점.

 

 

 

로저 테일러는 브라이언 메이를 사랑했다. 어떻게 브라이언을 안 사랑할 수가 있지? 로저 테일러는 의문을 가졌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새끼였다. 무엇보다도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로저는 겁이 없는 놈이었고 그래서 사랑을 깨닫자마자 바로 고백했다. 그때는 일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르지도 않았을 때였고, 그래서 브라이언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을 때였다. 브라이언은 그저 비웃었고 로저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 손은 무참히 브라이언에게 꺾여 내려왔다.

 

 

 

-날 사랑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테일러.

 

 

 

로저의 얇은 팔목을 붙들고서 브라이언은 그렇게 말했다. 브라이언의 악력은 굉장히 강력한 편이었다. 로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누군가의 발밑에 있던 적이 없는 로저였다. 하지만, 너한테만큼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그들의 일방적인 계약 관계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제임스의 볼을 붙잡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지?’라고 말했다. 어제는 옆 학교 전교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B하고 마주치면 허리 좀 숙이고, 인사도 하고.’라고 말했다. 그저께는 항상 B에게 적대적이었던 선생의 차 유리를 깨뜨렸다. 똑똑한 로저 테일러는 어떻게 협박을 하고 폭력을 가해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초장부터 주먹이 나가면 재미가 없었다. 브라이언 메이의 명령을 그렇게까지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학교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브라이언이 먹이사슬의 가장 위편에 있었다. 그 아래는 로저 테일러. 그 아래는 로저의 친구들. 그 아래는 선생이든 학생이든 하여튼 보잘 것 없는 녀석들. 로저는 이러한 관계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브라이언에게 묻곤 했다.

 

 

 

-브라이언. 너 지금, 행복해?

-행복한 게 뭔데.

 

 

 

로저는 브라이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 브라이언을 보는 자신은 너무 행복해서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언에게 꼭 필요한 사람. 굳이 연인이나 애인이 아니어도 좋았다. 로저는 행복했다.

 

 

 

***

 

 

 

로저는 키들키들 웃었다. 어제의 일이 자꾸 생각났다. 근처에는 학교가 많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녀석들도 많았다. 브라이언에게 유독 싸가지 없게 굴던 자식들이 있었다. 옆 동네의 H 고등학교. 브라이언은 딱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조용히 좀 시켜.’ 로저는 그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야구빠따와 각목, 그런 것들을 가지고 H고의 교문에 들어섰다. 이미 학교는 파한 시간이었고, 남은 자식이라고는 브라이언의 눈에 거슬리던 그놈들 뿐. 로저의 편이 이겼다. 아주 완벽하게 이겼다. 한 녀석의 입가에서 피가 찔찔 흘러나와 운동장 모래에 엉켜 붙었다. 로저는 매몰차게 웃었다. ‘그러게 B가 말할 때 좀 잘 듣지.’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전했다. 브라이언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네온사인 불빛에 브라이언의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웃을 때, 너무할 정도로 잘생겼다고 로저는 생각했다. 브라이언은 로저를 한참 내려다보았고, 날선 턱을 제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로저의 입술에 키스했다.

 

 

 

브라이언의 입술이 가지고 오는 감촉. 마른 입술과 마른 입술이 엉키는 감각. 천천히 입술을 애무하는 혀. 이내 안쪽으로 침범해 치열을 고르게 훑어내는 혀. 입천장을 매만지고 지나가는 혀. 엉키는 혀와 혀. 로저의 턱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침. 키스는 짧았다. 고작해야 이삼 분이었다. 하지만 브라이언과 키스하고 나면, 로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감히 브라이언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서늘한 골목길 씨멘트 벽을 붙들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기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로저 테일러는 브라이언 메이를 사랑했다.

 

 

 

-잘했어. 로저.

 

 

 

이름을 불러줬다. 로저는 감동하여 울지 않은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언은 얼굴의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양옆의 가로등과 네온사인과 그런 것이 그의 뒷모습을 화사하게 밝혔다. 로저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키들키들. 로저는 며칠이 지나서도 한참,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더 열심히 브라이언이 시키는 바를 따랐다. 또 누가 아는가? 자신이 일을 잘 해내면, 키스를 또 받을 수 있을지. 자신이 사랑하는 왕이, 감히 입맞춤으로 저를 치하해줄지.

 

 

 

***

 

 

 

 

로저의 악취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담배빵을 놓는 일. H고에서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흠씬 얻어맞으면 사람은 한동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시야는 그대로 어둠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 아무 곳으로나 기어가는 놈들. 그런 놈들을 보는 것은 좀 우습다. 로저는 천천히 놈을 따라가다가, 제가 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고, 놈의 살결에 비빈다. 꾹 누르고 몇 초를 기다린다. 끔찍한 비명 소리. 물론 고작 담뱃불 하나로 살 타는 냄새는 안 나지만. 옆에서 로저의 친구들이 낄낄거렸다.

 

 

 

-너 그딴 거 어디서 배웠냐?

-B한테서.

 

 

 

로저가 씩 웃었다. 브라이언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기분 나쁠 때가 있었다. 또한 로저가 해낸 일에 만족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냥, ‘경고만 줘’, 라고 했는데 로저가 엇박자로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팼다거나. 그러면 뒤처리가 상당히 곤란해지곤 했다. 브라이언은 일이 귀찮아지면 성질을 냈다. 로저가 들고 있던 담배를 뺏은 뒤, 로저를 밀쳐 의자에 앉히고, 그의 바지 위에 얹어놓곤 했다. 그렇게 몇 분이었다. 가냘픈 담배는 얇은 교복 바지를 금세 태웠다. 브라이언은 멈추지 않았다. 로저의 하얀 살에 담배 끝이 닿았다.

 

 

 

-아파, 브라이언. 아프다고.

 

 

 

로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브라이언은 대꾸하지 않았다. 꾹 다문 브라이언의 입술은 그가 화가 났음을 증명했다. 로저는 브라이언을 화나게 한 것을 후회했다. 다음 번에는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나서야 브라이언은 담배를 교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알아서 치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미안해. 브라이언. 용서해 줘.’ 로저가 브라이언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지만 그는 대꾸가 없었다. 로저는 기어갔다. 기어가서 꽁초를 제 교복 주머니 안에 넣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다음부터는 잘 하기로 로저는 마음먹었다. 실제로 명령을 잘 해내면 브라이언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실수라도 한다면? 로저의 허벅지는 다시 담배로 지져졌다. 허벅지에는 이제 열 개가 넘는 자국들이 있다. 로저는 샤워를 하면서 제 나신을 들여다볼 때마다, 브라이언이 주었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우스운 것은, 아무리 고통이라 할지라도, 브라이언이 주어서 좋았다는 점이었다. 로저는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너라면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좋다. 그러한 마음이었다.

 

 

 

 

 

 

 

 

 

The Boy From Ipanema

 

 

* 서핑이 취미인 브라이언, 물을 두려워하는 로저.

* 그들의 마지막 여행.

 

* bgm: The Girl From Ipanema_Stan Getz & Joao Gilberto

             https://youtu.be/j8VPmtyLqSY

 

 

 

 

 

 

 

브라질 리우에는 이파네마, 라는 이름을 가진 해변이 있대. 로저는 브라이언의 말을 기억한다. 이파네마. 로저는 천천히 그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입 안에서 동그랗게 말려 나오는 이름. , 언젠가 거기 가 보고 싶어. 그런데 브라질이라니. 멀기도 하지? 브라이언이 웃었다. 브라이언은 항상 먼 세상을 꿈꾸었다. 지구본을 천천히 돌려가며, 그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짚어 보이곤 했다. 가까이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멀게는 남태평양의 조약돌만한 섬까지 향하던 손길. 로저는 턱을 괴고 지구본을, 지구본 너머의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로저는 항상 바깥의 세계를 꿈꾸는 브라이언의 태도를 좋아했다. 꿈꾸는 브라이언은 항상 생경하고도 찬란했다. 항상 먼 세계를 향하는 네 눈빛. 바깥 세상으로 활짝 펼쳐질 것만 같은 너의 미래.

 

 

그리고 조금은 쓸쓸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네 그 빛나는 미래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는가? 브라이언은 혼자서 훌쩍 떠나 버릴 생각이 아닐까? 그래서 외로이 묻곤 했다. 나도 데려갈 거야? 의도치 않았지만 제 목소리가 몹시도 처연했다. 당연하잖아, 로저. 브리가 수평선을 응시하던 시선을 로저에게 돌렸다. 그 눈빛을 마주보면 로저는 안심할 수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확신을 주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본 사람은 없었다. 로저는 웃었고 브라이언도 웃었다. 둘은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었다. 함께 바라보던 바다 속으로 저녁놀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둘의 행복도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

 

 

 

브라이언은 취미가 많았다. 하나는 서핑이었다. 브라이언의 자취방에 갔다가, 액자를 들여다본 일이 있다. 액자 속에는 시원하게 수영복 바지를 걸친 앳된 브라이언이 서 있었다. 고등학생 때야? , 일학년 때였나? 지금보다는 허우대도 조금 작은 편이었고, 귀밑까지 잘라낸 머리칼이 곱슬대고 있었다. 너 존나 귀여웠네. 지금은 귀여움 다 어디 갔냐. 로저가 진지하게 말하자 브라이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 브라이언은 서핑보드를 들고 있었다. 로저로서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스포츠였다.

 

 

-너 서핑 해?

-, 여름에만 가끔.

-하여간 취미도 존나 많아요.

-같이 바다, 갈까?

 

 

그 말을 하고 나서, 브라이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그렇게 말했다. 로저는 브라이언이 미안해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뭐가 미안해. 나중에 같이 가. 로저의 무심한 표정에도 브라이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사소한 면에서도 다정한 녀석이었다. 대책없고 낄낄대기만 하는 또래 이십 대 남자애들하고는 달랐다. 로저는 그런 면에서 브라이언을 사랑했다. 어른스러웠다. 어른이었다. 반면 로저는 자신이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손가락을 뻗어 액자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너의 과거를 한순간이라도 더 오래 품어보고 싶었다. 왜냐, 내가 지금껏 몰랐던 너의 생이었으니까.

 

 

 

***

 

 

 

로저는 바다를 무서워했다. 아니, 정확히는 물을 무서워했다. 트라우마니 억압이니 하는 정신분석 용어를 가져다 붙일 것도 없었다. 형제가 물속에서 죽었다. 함께 빠졌고 같이 허우적댔는데 로저만 살아남았다. 어린 형제의 작은 손을 자신이 쳐냈던 것을 기억했다. 형제가 아득한 표정을 지으며, 물 밑으로 가라앉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손을 쳐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라앉아도 함께했어야 했는데. 금세 나이든 사람들이 달려왔고, 로저의 상체를 끌어당겨 물 밖으로 밀어냈고.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형제를 찾아내지는 못했고. 그 날 밤이 되어서야 형제의 마른 시신이 물가에 떠밀려왔고. 좋지 못한 기억이었으며 로저는 매일 나쁜 꿈에 시달렸다. 그게 벌써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옛날이었다.

 

 

남들한테는 결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영장도 못 가고 바다도 못 가고 계곡도 못 간다, 라는 사실을 고백하면 돌아올 시선이 두려웠다. 하지만 왠지 브라이언한테는 말할 수 있었다. 네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브라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들었다. 아직도, 그 일에 대해 꿈을 꾼다고 말하자, 브라이언이 로저의 등허리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제 품 속에 파묻힌 로저의 귓가에, 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자고 가.

-?

-나쁜 꿈 꾸면 내가 깨워줄 수 있잖아.

 

 

그게 얼마나 다정한 말이었는지, 그 말에 얼마나 울어버리고 싶었는지, 울음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으려고 오글거린다, 라며 너를 얼마나 꼬집었는지, 그 방은 어찌나 좁고 어찌나 온기가 느껴졌던지. 브라이언은 결코 모를 것이었다.

 

 

 

***

 

 

 

둘은 바다로 향했다. 기차역에 가서, 편도 표를 끊었다.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은 갔다. 브라이언이 옆에서 깜빡 잠들었다. 감긴 눈매와 날선 콧날과 직선으로 뻗어내리는 턱, 같은 것을 유심히도 살폈다. 점차 동이 트는 시각이었다. 기차가 달릴수록 창밖 세상이 환해지고 있었다. 도심지의 풍경은 이내 보다 전원의 풍경으로 바뀌어갔다. 도착해 내렸더니 소금내가 먼저 났다. 바다다. 바다. 대관절 얼마만의 바다이던가?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별볼일 없는 민박집이었다. 하지만 그런 휴양지의 민박집이란 보통 거기서 거기이므로, 그들은 그 환경에 만족했다. 캐리어를 두고 천천히 바닷가로 걸어갔다. 걸으면 걸을수록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졌고 짠내가 짙어졌다. 한순간에 야트막한 건물들이 사라지고 풍경이 탁 트였다. 아주아주 먼 곳까지 시퍼런 파도가 일렁였다. 바다였다.

 

 

바다. 로저가 중얼거렸다. 평생 올 수 없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너와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로저는 브라이언의 손을 겹쳐 잡았다. 지나가던 남성 하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런 시선에는 이제 익숙했다. 그들은 천천히 모래사장 쪽으로 걸음을 디디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대여한 서핑 보드를 모래사장에 내려둔 브라이언. 썬베드에 누워, 햇볕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로저. 튜브에 몸을 싣고 낄낄대는 사람들과, 그들을 싣고 밀려나갔다 들어오는 파도. 로저는 제 옆에 앉은 브라이언의 등을 탁 쳤다. 선크림을 발라준 살결이 미끈미끈했다. 브라이언이 돌아보았다.

 

 

-가서 놀아. 니 서핑하러 왔잖아.

-너 두고 어떻게 혼자 놀아. 재미없게.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파도에 발목이 잠긴 로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브라이언이 외쳤다. 괜찮아? 로저는 대꾸하지 못했다. 괜찮지 않은 것 같았다. 옆에서는 초등학생뻘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마구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결국 터덜터덜 돌아서 썬베드에 몸을 맡겼다. 로저는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다. 기껏 너하고 놀러 왔는데. 나는 아직도 이 모양. 로저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중얼거렸다.

 

 

-들어가면 누가, 내 발목 잡아당길까봐 무서워.

-무서워?

-. 존나 쪽팔리네.

-내가 잡아줄까?

 

 

브라이언이 말했다. 지금 뒤로 빼는 것은 도리가 아닌 양 싶었다. 로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 놓치면 죽여 버릴 거야.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한 손에는 서핑보드를, 한 손에는 로저의 가는 손목을 잡았다. 물가로 다가가며 로저는 다시 긴장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브라이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젖은 모래가 발바닥에 들러붙었다가 빠져나갔다. 물미역 같은 것이 발목을 감싸고서 다시 흘러갔다. 로저는 긴장했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참았고, 눈을 질끈 감았고, 브라이언은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기다려 주었고, 그런 식으로 아주 천천히. 물이 정강이께에 들어차 있었다. 실제로는 그다지 깊지도 않다는 걸 알면서도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기절하는 건 아니겠지? 로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존나게 쪽팔릴 것이었다. 정말로 존나게.

 

 

브라이언이 서핑보드를 수면에 띄웠다. 잘했어. 여기까지 잘 왔어. 앉아봐, 여기. 로저는 제 몸을 맡기듯이 서핑보드에 걸터앉았다. 힘 좀 빼고. 로저는 제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을 느꼈다. 사방이 온통, 물이었다. 이렇게 물이 많은데 안 빠져 죽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로저는 브라이언의 어깨에 다급히 손을 올렸다. 무서워. 잡아줘. 로저가 속삭였고, 브라이언이 한 손으로 로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일 분. 이 분. 서핑보드는 물결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이제 숨을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그제야 로저는 맞닿은 브라이언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맨살과 맨살이 붙어 있으니까 안심이 되었다. 우습지만 그랬다.

 

 

-이제 괜찮아?

 

 

브라이언이 걱정스레 물었고 로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핑보드란 것이 꽤나 유용했다. 드러누워 있을 수도 있었고, 엎드려 물을 헤집을 수도 있었다. 로저는 정말 처음으로 물 위에 둥둥 떠서 웃어본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물 안에서 머물렀다. 로저는 여전히 제 몸과 보드를 붙잡고 있는 브라이언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들였다.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진득하게 맞닿았다. 바닷물이 몇 번이나 튀어 짭짤한 맛이 났다. 놀라서 수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입맞춤 하나마저도 그리 소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상당히 로맨틱한 장면이었다고, 로저는 생각했다.

 

 

 

***

 

 

 

물에서 나와 어촌을 산책했다. 어느덧 해가 까무룩 지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 재밌었어? 브라이언이 물었고 로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에 정차된 어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것들, 정말 물고기 잡으러 갈 때 쓰는 거 맞을까. 로저는 궁금했다. 그런 작은 어선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출항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촌을 돌고 돌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우연찮게 아까 그 해변으로 다시 향했는데, 애들 몇이 싸구려 불꽃을 터뜨리고 있었다. 옆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는 걸 보니까, MT라도 온 게 아닌가 싶었다. 로저가 중얼거렸다.

 

 

-나 저거 하고 싶어.

 

 

브라이언은 말을 참 잘 듣는 타입이었고, 로저의 손에 폭죽을 쥐어주었고, 로저는 제 라이터를 어찌 이용해서 불을 붙였고, 하늘을 향해 얇고 초라한 빛이 몇 번이고 튕겨 나왔다. 로저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브라이언도 웃었다. , 동영상 찍어줘. 빨리! 로저가 재촉했고 브라이언이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는데 벌써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에이, 재미없네. 로저가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하나 더 사다줄까? 브라이언이 말했으나 로저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됐어.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 이 정도 크기의 행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브라이언은 결코 로저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불꽃을 마음껏 튕겨내는 로저가 몹시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밤바다는 인간 존재를 센티멘털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어느새 불꽃을 켜며 떠들던 녀석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민박집에서 밀려나온 은은한 형광빛, 생경한 달빛, 그런 것들이 제멋대로 바다 위로 떨어졌다. 바다는 검었고 붉었고 파래졌다고 곧 희어졌다. 오래 바라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기분 좋은 습기가 두 사람을 천천히 감싸고 있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때 브라이언이 말했다.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꼭 돌아올게.

-무슨 평생 안 올 사람처럼 말을 하냐…….

-꼭 올 거야. 널 위해서라도.

 

 

브라이언은 확신에 차서 중얼거렸다. 로저는 이라고 강조하는 브라이언의 말이 좋았으나 불안했다. 불안해서 너를 감싸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브라이언은 언제고 먼 곳을 꿈꾸는 사람이었고 머리도 참 좋았다. 먼 곳에서 어려운 것을 배워 오고 싶다고 말했다. 로저는 그의 희망을 반대하지도 꺾지도 않았다. 브라이언의 생을 자기 손으로 망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가 더 좋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풍경에 제가 끼어 있지 않다는 것이 좀 섭섭할 뿐이었다. 로저는 눈을 질끈 감았고, 자신이 브라이언에게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팠다. 고작 이십 대에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만은, 어쨌든 아팠다. 의사는 경과를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환자도 몇 없고, 해외 학술지에도 치료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의사의 말에 로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먼저 떠난 형제가 저를 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물속에서 제 몸을 쳐낸 것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브라이언이 알게 되면, 그는 결코 공부를 하러 떠나지 않을 것이다. 로저의 곁에 남아 있으려고 애쓸 것이다. 로저는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브라이언은 지금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로저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너를 안아주는 손길을 더 깊게 하려고 애썼다. 머뭇거리다가 사랑한다, 고 말하기까지 했다. 브라이언이 기분 좋게 웃었고 그 웃음이 참으로 좋았다. 평생 곁에서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 바다는 지나칠 정도로 평화롭게 흔들렸다. 수평선이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파도를 밀어보냈다. 공기가 달콤했다. 이제 먼 곳으로, 서로를 보내주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

 

 

 

우리의 연애란 것은 아름다웠고 한순간 불꽃놀이 같았으나 그래서 더 빛났고. 나는 그 바다에서 우리가 보았던 풍경과, 정서와, 다정한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꼭 이파네마에 가길 바란다. 그곳의 공기를 느끼고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그래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고 로저는 썼다. 삐뚤빼뚤한 필체였으나 내용은 마음에 들었다. 주소를 명확히 적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편지를 받은 브라이언의 표정이 궁금했다. 천천히 편지지를 들어, 키스했다. 네가 로저의 키스를 받을 수 있을까.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라거나 바다같은 단어는 참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단어도 몹시 아름다운 편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그러한 단어들처럼, 오래오래 고운 풍경으로 흔들렸으면 좋겠다 기대할 뿐이었다. 이제,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는가? 나는 알 수 없다. 당신은 아는가. 안다면, 부디 대답해 달라.

 

 

 

 

 

 

 

 

無題

 

 

*메일러

*퀸 120분 전력 참여.(@Queen_120min) 키워드 「소나기

 

*사망소재 주의

 

 

 

 

 

 

 

  새벽 두 시 오십 분. 브라이언은 펜을 들었다. 심야 라디오에서는 엘리엇 스미스의 Miss Misery가 아주 구체적으로 흘러나왔다. 이 계절에, 이 날씨에 엘리엇 스미스라니. 신청한 사람이 좀 악취미라고도 그는 생각했다. 어둑한 방에 희미한 스탠드 불빛이 어룽거리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자, 무수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장마가 오려면 멀었다. 아마도 잠깐 지나가는 소낙비에 불과할 거였다. 브라이언은 창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응시하다가, 다시 종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상은 점점 축축해지고 있었다.

 

 

*

 

 

 

  로저, 간밤에 몹시도 나쁜 꿈을 꾸었고 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등장했어.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일 년 만에 다시 너의 꿈을 꾸었어. 너는 참 화사하게도 웃고 있었지. 그 때, 기억나? 영화관에서 우리는 아주 싸구려 로드무비를 보았잖아. 내용은 천박했지만 너가 좋아하는 자동차가 잔뜩 나왔지. 너는 그걸 다 보고 나서, 자기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말했어. 그 날이 또 꿈에 나왔어. 너는 이렇게 말했지. ‘, 존나 희대의 명작이야.’. 꿈에서 우리는 영화관에서 걸어 나왔어. 너는 도로에 세워진 차가 참 마음에 든다고 말했지. 너는 그 차로 신이 나서 걸어간 다음, 냉큼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어딘가로 떠나 버렸어. 나는 멀어지는 네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어. 너를 붙잡을 수도 없었어. 왜냐하면 너는 너무 빠르게 운전해서 떠나갔기 때문이야. 거기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너와 차는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너무 끔찍한 기분이었어. 영화관 앞에 한참 동안 서성거렸어. 그러다가 바로 깨어났지. 꿈에서 깼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 너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깨어나 버렸잖아. 너를 기다려주지도 못하고. 꿈속에서 너가 날 찾으면 어떡하지?

 

 

  왜 하필이면 그날 일을 다시 꾸었을까. 왜 하필이면 자동차였을까. 아마 소낙비 소리 때문이었을 거야. 그 날에도 비가 왔었으니까. 로저 네 표현을 빌리자면, 존나, 씨발, 많이, 비가 왔으니까 말이야.

 

 

 

*

 

 

 

  브라이언은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는 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자연 현상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비가 올수록 브라이언은 무뎌졌다. 사람은 언제고 그런 식으로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이제 브라이언은 비를 생각할 때 로저, 너를 떠올리지 않는다. 너를 떠올리기보다는 우산을 먼저 챙긴다. 너를 걱정하기보다는 출근길의 교통상황을 염려한다. 적어도 브라이언, 본인은 그렇게 믿었다. 이제 나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잊고 살아나갈 것이다. 너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지만 인간의 믿음이란 것은 참으로 기구하고 모질기 그지없었다. 브라이언은 오늘 꿈에서 깨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크게 한숨을 쉬었고,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았고, 스탠드 불빛을 켰던 것이다. 한참을 쓰고 나니 노래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디제이 목소리를 놓쳐서, 제목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But if you wanna leave, take good care. 그는 다시 펜을 들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

 

 

 

  너는 답지 않게 낭만적인 일을 좋아했지, 로저. 조악한 장미꽃이나 내가 서툴게 쳐 준 기타 소리 같은 것들. 너에게 그런 걸 건넬 때마다 너는 어린 여자애처럼 웃었어. 우리의 짧은 연애는 항상 그런 식이었잖아. 나는 너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너는 얼굴이 새하얘질 정도로 웃다가 나에게 키스하는 것. 그러고 보니 꽃 축제에 갔던 일이 생각나. 우리는 결코 그런 축제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그냥 지나가다가 들어갔던 거였잖아. 대관절 이름도 종류도 알 수 없는 무수한 꽃들이 지천에 펼쳐져 있었어. 관광객들은 몹시도 적어서, 그 넓은 부지에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어. 너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녔지. 심지어 전날에 새벽 다섯시까지 함께 술을 먹었는데도! 정말 건강하던 시절이었어. , 이제는 그렇게 활기차게 살아가지 못해. 로저.

 

 

  그날 꽃들 사이에서 웃던 네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말해주었어야 했어. 너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귀끝을 붉히면서 나를 한 대 갈겼겠지만, 그래도 말해주어야 했는데. 너에 대해 생각할수록 나는 후회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후회하면서 동시에 너에게 묻고 싶어. 왜 그런 식으로 떠났던 거야? 왜 그렇게 비가 무수히 쏟아지던 날에 차를 몰고 나간 거야? 너는 그날 나에게 잔뜩 화가 났었지. 나는 그 다툼의 이유가……, 너무 사소해서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어. 솔직히 이제 네가 좋아했던 계절도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너는 적어도 비 오는 날은 좋아하지 않았잖아. 그런데도, , 그런 날에. 나를 그렇게 떠나버린 거야?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냥 사소한 추돌 사고라고 믿고 싶었어. 병원으로 갈 때도 비가 그렇게 많이 왔었어. 택시 기사가 말했지. 어휴, 뭔 비가 장마두 아니고 많이도 오네. 급한 일이라도 있나 봐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어. 속으로는 닥치고 빨리 운전이나 하라고 내뱉고 싶었지. 그 정도로 나는 급했어, 로저. 나는 너가 간절했어. 다리나 팔, 한 쪽이 부러져서 끙끙대고 있을 너를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로저. 너와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에 대해 말해봤자. 대체 무슨 소용이.

 

 

 

*

 

 

 

  펜을 쥔 팔이 좀 아파왔다. 이렇게 긴 글을 써낸 것은 오랜만이었다. 브라이언은 졸음에 살짝 침침해진 눈으로 다시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과연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했다. 사는 것도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브라이언의 삶에서 사람들이나 사건들은 언제나 스쳐 지나갔다.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에는 그게 참 서러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너가 떠난 것은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브라이언은, 로저 너를, 정말 지독하게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심야 라디오 방송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 방송의 천오백이십삼번째 밤, 함께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여러분. 디제이의 말을 들으면서, 브라이언은 서둘러 마지막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얇은 종이 옆에 펜을 내려놓았다. 황급히 스탠드 불빛을 끄자 방은 어둠에 퐁당 빠져들었다. 그제야 브라이언은 눈가를 마른 손가락으로 마구 비빌 수 있었다. 지금의 시절에는 해가 이르게 뜬다. 햇빛이 들어오기 전에, 어서 다시 눈을 붙여야 한다. 브라이언은 다시 침대로 들어가서 이불 아래 파묻혔다. 그가 남긴 몇 단위의 문장들만이, , 로저를 추억하고 있다.

 

 

 

*

 

 

 

  우리의 연애는 참 애처로웠지. 그날 오던 비는 참 서글프기도 했지. 사랑해, 나는 여전히 너를. 그러니까 삼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R에게, 브라이언이.

 

 

 

 

 

여름의 연대기

 

* 메일러.

* 120분 전력 참여.(@Queen_120min) 키워드 내가 널

* 고등학생 AU.

 

 

 

 

 

 

'브리, 우리 도망갈까?' 로저는 불현듯 그렇게 말했다. '그럴까?' 브라이언이 되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로저가 다시 물었다. '너가 가고 싶은 곳으로.'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여기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아. 여기만 아니면.' 로저의 말에 브라이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다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로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 말에 로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 같다.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다.

 

 

 

***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아무도 삶이 이렇게 힘들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경고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살아내야 할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벅찼다. 고작 고등학생의 나이였는데도 그랬다. 삼년제 기숙 고등학교의 삶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어떤 자유도 용납되지 않았다. 고된 감옥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도, 브라이언과 로저가 키스를 하다가 선생 하나에게 들켰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배로 힘겨웠다.

 

 

그들의 작은 연애가 들킨 날에, 로저는 머리채를 잡혀 화장실에 질질 끌려갔다. 단단한 세면대에 얼굴이 몇 번이나 처박아졌다. 입술이 터지고 고인 물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물에 다시 얼굴이 잠겨졌고, 이젠 정말 죽겠구나, 싶을 때가 되어서야 다시 얼굴이 물에서 꺼내졌다. '씨발, 니네 학생한테 이렇게 좆같이 굴어도 돼?'에 찬 로저는 그렇게 외쳤다. '니들은 어차피 여기서 뭔 일을 당해도 몰라. 꿇으라면 꿇어. 호모짓 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선생은 그렇게 말했다. 억울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로저는 학교 밖에 저를 지켜줄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세상의 전부는 브라이언밖에 없었다.

 

 

너는 지금 무슨 나쁜 일을 겪고 있을까. 그 날 밤, 하루 종일 얻어맞으면서 로저는 브라이언의 생각을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걷어차이는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로저의 오른쪽 다리에 금이 가고서야 그 가혹한 폭행은 멈춰졌다. '다음에 다시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조용히 다녀.' 선생의 말에 로저는, 차가운 화장실 타일에 누워 비웃었던 것 같다. 니들이 하지 말라고 안 할 줄 알아? 니들이 걜 알아? 걔하고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뭘 알아? 로저는 오히려,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

 

 

 

계절은 여름의 한창을 지나고 있었다. 기숙사 방 안은 습하고 무더웠다. 선풍기가 기운 없이 떨며 돌아갔는데, 거기서 나오는 바람이라고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교복 셔츠는 지나치게 타이트해서 숨이 막혔다. 로저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고, 브라이언은 침대 아래에 기대고 앉아 기타를 두고 치고 있었다. 아주 손톱만큼만 열 수 있는 창 너머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었다. 로저는 눈을 감고 기타 소리를 들었다. 너는 꽤 재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렇게 기타 소리가 좋을 리 없었다. 로저는 행복하다고도 생각하다가 이내 좆같아졌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브라이언 옆에 앉았다. 브라이언이 로저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제 밤 샜다며. 좀 자 둬.

존나 쪄죽겠어서 잠도 안와.

 

 

로저는 한쪽 턱을 괴고 브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얼굴은 선이 참 곧았고 깊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로저가 처음 보자마자 반했을 만도 했다. 허나 로저는 브라이언의 뺨 한쪽에 난 상처가 영 신경이 쓰였다. 얼굴에 깊게 베인 상처여서 몇 주가 지나도 쉬이 낫지 않았다. 로저는 브라이언의 상처를 보게 된 그 날을 다시 상기해 보았다.

 

 

저 새끼들이 너한텐 뭔 짓 한 건데?

별 일 없었어.

 

 

로저가 다급하고 분한 목소리를 내자 브라이언은 웃으며 말했다. 대신 브라이언은 로저의 몸을 끌어안았고, 로저의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고, 터진 자국을 만져 주었다. 아프겠다거나 같이 욕을 해주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브라이언의 손가락이 로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고 그건 무엇보다도 큰 위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저의 분한 기분이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애인 얼굴에 칼빵을 놓다니, 선생들이라고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들이었다. 로저는 진심으로 그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몇 주가 지나도 그런 기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로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사납게 중얼거렸다.

 

 

여기 너무 좆같다.

나도 좆같은데, 그래도 너가 있으니까.

 

 

브라이언의 말에 로저는 피식 웃었다. 가끔씩 치고 들어오는 것이 능수능란한 브라이언이었다. 그의 말은 답지 못하게 로저를 두근거리게 했다. 대꾸하지 않던 로저는 브라이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사랑이란 말은 입에 담기 참으로 무거운 말이었지만 그치만,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그 동안 세상에서 로저 옆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다시피 했다. 쫓기듯 몰려온 이 학교에서 너를 만나게 될 줄이야. 둘은 만나자마자 급속히 친해졌고,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마저 좋아하게 되었다. 고백하는 것도 거의 망설이지 않았다. 그 때 로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 내가 널 좀 좋아하는 것 같은데. 닌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지금의 마음은 그 때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 맺혀 있었다.

 

 

. 알아. 모를 리가 없잖아.

나 너 존나 사랑해.

로저. 나도 사랑해.

 

 

무심히 기타를 연주하면서, 브라이언은 그렇게 말했다. 그 대답은 참 듣기가 좋았다. 아무리 삶이 좆같아도 너를 생각하면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문득 로저는 말했던 거였다.

 

 

브리, 우리 도망갈까?

 

 

 

***

 

 

 

여름밤은 몹시도 고요했다. 학교 주변을 둘러싼 숲을 빠져나오면 커다란 도시가 있다고 했다. 희미한 달빛에 기대서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라일락 향이 나는 밤이었다. 흘끗 바라본 밤하늘은 보랏빛으로 감싸져 있었다. 로저는 문득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도망가면, 너 대학 못 가는 거 아냐? 가고 싶어 했잖아. 우주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잖아. 우주에는, 여기보다 더 좋은 세계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 브라이언은 제 등에 맨 기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 대신에 음악 하면 되지. 너도 같이 해.' 로저는 피식 웃었다. '난 기타 못 치는데?' 브라이언 역시 따라 웃었다. '너 똑똑하니까 다른 거라도 독학하면 되지.' 그들은 마주보고 실없이 웃기만 했다. 학교 밖에는 더 나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바깥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래도 너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산다는 것은 참 불확실하고 두려운 법이었다.

 

 

아주 먼 곳에서, 모노톤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의 우울한 프리티걸

 

* 메일러.

* 브라이언 x 로저리나

 

* 가정폭력 소재 주의

 

 

 

 

 

 

나는 타인의 삶에 대해 가끔 생각하곤 했다. 원래 산다는 것은 이렇게 힘이 드는 거냐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어제 본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말했다. 산다는 것은 네온사인 아래서 춤추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삶은 빛나고 있는가? 빛날 만한 것들은 이미 모두 다 무너져버리지 않았나? 좆같다. 이게 누구 탓인가. 내 탓은 아닌데. 설마 내 탓인가? 근데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래? 내가 존나게 예쁜 것도 잘못이야?

 

 

로저리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엉엉 울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몹시 자주 울었다. 하지만 아무도 너가 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생각을 그만 하자. 생각을 그만. 이제 정말로 그만브라이언? 걔 생각은 이제 제발 그만……. 로저리나는 얌전히 주저앉아 제 머리카락을 감싸 안고 중얼거렸다. 그 자식 목소리 그만 떠올려. 얼굴도 그만 상상해. 그런데 아까 걔 자세 숙였을 때 향이 참 좋았지. 남자애가 향수도 뿌리나? 아니, 생각 좀 그만 하라고, 기지배야! 로저리나는 혼자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잔뜩 화를 내던 여자애는 기운이 쭉 빠져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주 좁아서 손톱만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 모서리부터 곰팡이가 흉측하게 번져 있었다. 이미 교체할 시기가 지나 겨우 연명하고 있던 형광등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장마철마다 벽지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우울한 냄새를 풍겼다. 제 좁디좁은 방에 누워 있던 로저리나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제 처지는 분명 그의 삶과는 몹시도 다를 거였다. 나를 걱정한다는 너의 말은 무슨 뜻이었지? 너는 정말 나를 이해하고 염려할 수 있나? 로저리나는 의구심을 가졌고 다시 성이 났다. 여자애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한숨이라도 쉬려는 찰나 현관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일어난 여자애는 잽싸게 일어나 불을 끄고는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모로 누웠다. 제발 닥치고 얌전히 자라, 새끼야... 간절히 눈을 감고 있던 여자애는 이내 제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다. 오늘도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로저리나, 로저리나. 지금처럼 자신의 이름이 역겨운 순간이 있을까? 여자애는 금세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고, 너무너무 불안했고, 약간 토하고 싶었고,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불 속에서 떨던 로저리나는 생각했다. 지금이 여름인 거 맞지? 여름 맞나? 왜 이렇게 춥지? 목소리가 계속해서 여자애의 이름을 읊었다. 한숨 한 번을 쉴 여유조차 없었다.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힘이 들었다.

 

 

***

 

 

 

브라이언은 어제 자신이 보았던 장면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애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어떤 중년의 남성이 그 애의 앞에 서 있었다. 행인들은 그들을 훑어보다가 금세 풍경 너머로 사라졌다. 브라이언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애는 항상 반에서 가장 빛났고, 그 애가 말할 때면 오후의 늦은 꿈이 흘러가는 것 같았고, 예민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또 그 앤 얼마나 새침한지 몰랐다. 여자애는 항상 애정 없는 눈으로 자신 주변의 세계를 훑었다. 그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보통 그렇지 않았는데도. 반 남자애들은 그녀가 예쁘지만 못된 년이라고 했으나 브라이언은 그녀를 좋아했다. 그 애를 처음 보자마자 좋아했는데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좋아한다, 라는 말에는 너무 커다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여자애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진짜. 무엇이 저 애를 벌벌 떨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저렇게 도도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잔뜩 떨고 있을까? 브라이언은 의구심을 가졌다. 남성은 그녀의 발치에 침을 뱉었고 머리를 몇 차례 건드렸고 브라이언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선생님.

 

 

중년 정도 나이대의 남성들은 선생님, 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한다는 걸 브라이언도 알고 있었다. 뭐야, 새끼야. 남자에게서 오래 묵은 술 냄새가 났다. 남성은 그를 칠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다시 여자애 옆에 가래를 뱉었고, 그리고 물러났다. 아마도 브라이언이 그보다 더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브라이언은 그가 추잡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여자애는 금세 브라이언을 노려보았다. 그 애는 부들부들 떨었고,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쏘아붙였다.

 

 

니가 뭔데 나대? 니가 뭔데 참견해?

 

 

딱히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황스러웠다. 브라이언은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데? 여자애는 입을 앙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여자애는 몸을 홱 돌려 빠르게 멀어져갔다. 마치 저에게서 도망치는 듯한 걸음이었다. 너 무릎이 까져서 엄청 새카매졌어. 브라이언은 그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브라이언은 멀어져가는 여자애의 금발머리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그 표정이, 아주 오래오래 생각이 났다.

 

 

그는 너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

 

 

다음날 브라이언은 로저리나에 대해 아이들에게 묻고 다녔다. 브라이언은 제법 학교에서 신뢰를 사고 있는 모범생이었고, 그래서 아이들을 순순히 여자애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들은 대부분 로저리나가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부부의 딸이며, 부부는 해외로 나갔고 딸은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로저리나에 대해서는 그러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여자애가 스스로 그러한 소문을 퍼뜨린 거였다. 브라이언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다. 브라이언은 여자애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로저리나는 학교에서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 애 주변에는 항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이 바퀴벌레처럼 드글드글했다. 여자애는 빛이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을 부나방처럼 그 애 주변에 몰려드는 것이었다. 모두가 적어도 너의 외관만큼은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교를 할 때만큼은, 여자애는 다른 이와 함께하는 법이 없었다.

 

 

여자애는 빠르게 걸었다가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멈추지 않았다. 여자애가 걸을 때마다 머리에 달린 리본이 힘없이 흔들렸다. 여자애는 점점 더 깊은 골목길로 돌아갔다. 그곳은 도시의 부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대신 사창가며 술집, 싸구려 클럽과 도박장이 아주 많았다. 거리마다 약쟁이들이 늘어져 있었고 소매치기들이나 양아치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도시의 한편에 위치한 우범지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곳에 직접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본격적인 밤 장사를 시작하기 전의 골목은 한산했고, 나뒹구는 쓰레기가 아주 많았다. 브라이언은 이 곳을 홀로 걸어가는 여자애가 걱정스러웠고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고 브라이언을 발견했다. 그 애는 금세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뭔데?

여기 위험한 동네잖아.

그러는 너는 여길 왜 오는데? 니 보모는 너 여기 오는거 말리지도 않냐? 설마 나 따라온 거야? 스토커지,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존나 음침한 새끼.

 

 

로저리나는 브라이언이 미처 해명을 하기도 전에 자기 말을 마구 쏟아내는 버릇이 있었다. 유명 교수 아들인 브라이언이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등하교한다는 것은 이미 전교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여자애의 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브라이언은 진심을 담아서,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너가 걱되어서 온 거야.

니가 왜 날 걱정하는데?

왜냐면.

 

 

브라이언은 선뜻 말을 꺼냈지만 뒷말을 잇지 못했다. 널 좋아하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은 아주 큰 결심이 필요했고 브라이언은 그 정도까지 결심이 굳지 않았다. 언제나 느꼈지만 그 말에는 일정한 무게가 따랐다. 함부로 뱉어내는 건 책임감 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머뭇거리다가 그냥’, 이라고 덧붙였다. 그냥, 이라니 얼마나 무성의한 말인지. 브라이언은 후회했고 여자애는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존나 돌아버리겠네. 여자애는 중얼거리더니 이내 답지 않게 한숨을 폭 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알았어.

우리 집 존나 파탄났고 애비란 새끼는 맨날 개패고 하루하루 뒤질 날만 기다리면서 살고 있으니까 같잖게 동정할 거면 그냥 꺼져. 씨발 동정 받는 게 제일 싫어. 알아?

,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넌 평생 몰라. 좋은 집에서 오냐오냐 큰 애가 뭘 알아?

 

 

로저리나는 짜증스레 제 앞에 놓인 찌그러진 캔을 걷어찼다. 캔은 탁, , , 하면서 골목 한복판으로 굴러갔고, 지나가던 자동차 바퀴가 그것을 다시 짓밟았다. 로저리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곽을 꺼냈는데, 유감스럽게도 거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삐딱하게 브라이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나 진짜로 걱정되면 담배 사다주라.

진심이야?

. 존나 피고 싶어.

 

 

정말 우습기도 하지. 브라이언은 순순히 골목의 구멍가게에서 여자애가 지칭한 담배를 사다 주었다.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 일미리요. 브라이언의 말에 계산원은 순순히 담배를 내 주었다. 교복 재킷을 무슨 수트로 착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브라이언의 키가 평범한 성인보다도 훌쩍 큰 탓이거나. 하여튼 여자애는 담배를 얌전히 받아들었고, 새침하게 입술을 내밀다가 고맙다고 말했고, 브라이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머쓱하게 말했다.

 

 

라이터도 사다줄까?

내가 그것도 없을 것 같애?

 

 

있으면 됐고. 둘은 어색하게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 늘어진 남자들을 지나칠 때마다 그들은 로저리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브라이언은 그들을 딱 한 대씩만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로저리나는 도통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걸었다. 타박타박. 그 애의 리본 달린 구두가 바닥에 부딪쳤다. 브라이언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녀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걸었다. 브라이언이 한 보폭을 내딛으면 로저리나는 두 번이나 걸음을 옮겨야 했다. 나 이런 거 너무 귀여워, 라고 말하면 돌아올 로저리나의 반응을 상상하다가 브라이언은 혼자 웃어버렸다.

 

 

뭘 쪼개.

별거 아냐. 근데 우리 저녁 먹을까?

돈 없거든.

내가 사줄게.

진짜? 나 남이 사주는 밥 존나 좋아해.

근데 나도 좋아해줬음 좋겠어.

 

 

로저리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 소리야? 아무것도 아냐. 너 진짜 실없는 새끼다. 내가 좀 그래. 둘은 그런 식의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브라이언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고백할 뻔 했지만 결국 고백하지 않았다. 지금은 알맞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저리나는 담배 연기를 뱉으며 걸었고 브라이언은 담배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나는 맨솔 담배가 좋아. 그게 뭔지 모르는데. 담배 한번도 안 펴봤어? 응.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지구가 끝나는 곳까지 영원히 걸을 기세로. 너가 원한다면 달까지도 걸어갈 수 있게. 우주 가장자리부터 저녁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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