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 네모진 아파트, 스스로를 가둔 로저.
*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브라이언.
이 동네는 사이렌이 자주 울려. 구급차 한 대, 혹은 소방차 무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지나가는 사이렌 말이야. 사이렌은 어딘가 사람을 불안케 만들어. 로저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아래 입술을 앞니로 꾹 눌렀어. 비척비척 걸어가 창 아래를 굽어보았어.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차선 도로.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나 비명 같은 경적과 함께 차량들이 지나갔지. 로저는 빈약한 샷시를 손으로 꾹 쥐었어. 사이렌이 울린다는 건, 무엇인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불타고 있다는 의미야. 로저는 꼭 죽거나 불타고 있는 것이, 제 속에 잠든 마음인 것 같았어. 불안했지. 하루는 이 말을 브라이언에게 했어. 브라이언은 말했어.
/너를 불안하지 않게 할 방법을 찾아볼게.
그 방법으로 브라이언은 이사를 왔어. 로저의 아파트를 꼭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에. 로저가 칠 층이면 브라이언도 칠 층. 밤에 형광등을 켜고 손을 흔들면 보이는 거리. 이사올 필요까진 없다고 말했지만, 마침 계약이 끝나서 집을 옮겨야 한다고, 굳이 옮겨가야 할 것이라면 너와 가까운 집이 좋다고 브라이언은 웃었어. 언제고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어. 로저는 별볼일 없는 제 인생에서, 브라이언이 있는 것은 유일한 행운이 아닌가 생각했어. 인간의 생이란 것이 아무리 비참해도, 꼭 희미한 빛이 한번씩은 드리우는 법이야. 로저에게는 그 햇볕이, 브라이언. 브라이언도 로저를 그렇게 생각해줄까? 묻고 싶었지만 낯부끄러워 묻지 못했어. 사랑한다는 말도 잘 해내지 못하는 로저인걸.
로저가 언제부터 집 밖에 나설 수 없게 되었을까. 사람이 고립되는 데는 큰 비극이 필요한 게 아냐. 세상으로부터 자꾸 거절당하고, 밀쳐치고, 그래서 울었는데 아무도 내 울음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때, 그럴 때 사람은 스스로를 가둬. 로저도 그랬어.
하루는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만원 버스를 잡아탔어.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어. 멈춰선 창밖 풍경이 와들와들 떨었어.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시커매졌어. 이제 죽는다고 생각했어. 주저앉았고 승객들이 놀라 무어라 말을 걸었는데 들리지 않았어. 떨며 버스에서 내렸어. 정류장에 한참을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어.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어. 버스고 지하철이고 기차고 공원이고 놀이터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어. 결국 병원에 갔어. 의사는 그것이 '공황 발작', 이라고 말해주었어.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지만, 머리는 위험을 직감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지. 생경한 병명이었어. 그 뒤로 로저는 공황장애 환자가 되었어. 몇 가지 어려운 이름을 가진 병들이 뒤따랐어.
로저는 생각했어. '이대로 밖에 나갔다가 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다. 가족들이, 친구들이, 동료들이, 대체 뭐라고 하겠어?' 로저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어. 그래서 나가길 포기했어. 좁고 깜깜하고 아무도 없는 아파트 속에 남아있기를 택했어. 아파트 안이라면 아무도 로저를 동정하지 않았어.
그런 로저를 돌봐준 사람이 브라이언이야.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주고. 말보로 레드 보루를 쥐여주고. 오늘 바깥의 공기는 어떠했는지 일러주고. 자신이 지난밤에 꾸었던 꿈 속 풍경을 말해주고. '계절이 지나니까 사람들이 목도리를 하기 시작했어', 같은 비밀을 속삭여주고. 참 다정하게 로저를 챙겨주었어. 그래서 로저는 가족 하나 없어도, 제 아파트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어. 브라이언에게만큼은, 무너진 제 모습을 보여주어도 상관 없었어. 로저가 무너지면 일으켜 주고, 무릎의 흙을 털어줄 사람이었으니까.
둘은 매일 통화를 했어. 로저는 집 전화를 썼고, 브라이언은 휴대전화를 썼어. 때는 주로 브라이언이 퇴근한 밤. 어룽진 조명이 상대의 실루엣을 선명히 밝혀. 손 뻗으면, 꼭 잡힐 것만 같은 거리. ‘그렇다고 창밖으로 몸 숙이면 안돼.’ 브라이언의 목소리. 로저가 전화기를 고쳐 들며 물어.
/오늘은 어땠는데.
/로즈. 정오에 하늘 봤어?
/아니. 커튼 하루 종일 쳐 놔서.
/하늘 진짜 투명했어. 무슨 새파란 유리창 같았어. 구름도 없고. 일하다가 커피 사러 나왔는데, 사람들이 다 한번씩 하늘 쳐다보더라. 봤으면 좋았을 텐데.
/브리. 내가 보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뭔데?
/너. 건너 오면 안되냐. 주말이잖아. 내일.
/지금 가. 조금만 기다려.
기다려, 라고 말하자마자 창밖에서 멀어지는 브라이언의 형체. 어떻게 이렇게나 로저 말을 잘 듣는지. 호구 같고 착한 놈이야. 로저는 담배를 빼물어서,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셔. 야트막히 열린 창틈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들. 끊어야지, 하면서도 왜 끊어야 하는데, 하고 되묻게 돼. 브라이언을 기다리는 로저의 머리 위로 도시의 달빛이 떨어져. 로저의 머리를 푸르게 적시며 흘러내리는 빛.
담배를 몇 개비나 피웠을까. 두 개비. 세 개비. 다섯 개비. 이러다가 한 통을 다 비우겠다. 브라이언은 줄담배를 태우는 로저를 염려했어. ‘운동도 안 하는데 그렇게 피우면 어떡해?’ ‘운동 하는데. 숨쉬기 운동.’ 로저는 후, 하, 후, 하, 과장되게 숨을 뱉었어. 뱉다가 낄낄대며 브라이언에게 안겨 키스했어. 마주 입맞춤해주면서, 이불 위에 로저를 조심스레 눕혀주던 브라이언. 그런 날도 있었어. 그런 밤도 있었지. 그 기억을 생각하며, 로저는 이불 위에 모로 누워 널 기다렸어. 사랑하는 너가 있다면, 아파트에 갇혀 사는 삶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 로저였어.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또 울렸어. 누군가가 죽거나 무엇인가가 불타고 있겠지. 로저는 담뱃갑을 뒤적였어. 텅 비었어. 그 순간 로저는 깨달았어. '브라이언이 왜 오지 않지? 전화를 끊은 지 얼마나 지났지? 브라이언이 내 집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리지? 이상하지 않아?' 로저는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려 애썼어. '맥주라도 사오는 중이겠지. 아니면 갑자기 집 청소를 하고 싶어졌다거나. 뭐 음식을 해 가지고 올 수도 있어. 설마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있는 거 아냐. 안 어울리게 귀여운 짓도 하잖아, 걘.' 하지만 생각을 할수록 불안은 커졌어. 로저는 제 왼손바닥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어. 눈을 질끈 감았어. 담배를 또 물었다가 두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려놓았어. '어떡하냐. 진짜.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로저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생각을.
이제 알았어. 족히 두 시간은 지났을 거야. 로저는 발딱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어.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고, 앞 동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어. 브라이언의 집도 마찬가지였어. 울음이 나올 만큼, 새카만 도시의 밤이었어. 로저는 이를 꽉 깨물었어. 너무 큰 힘을 주고 다물어서, 잇몸이 아릴 지경이었어. 로저는 제 안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어. 그렇게 한참을 빛바랜 샷시를 쥐고 서 있었어. 그러다 보니 창틈으로 새벽이 파고드는 시간이 되었어. 아파트에 걸려 있던 초승달은 얄팍하게 흐려지고, 별들이 구름 너머로 물러서고, 세계가 천천히 밝아지고. 그렇지만 로저는 잠들 수 없었어.
사랑하는 네가 오지 않잖아. 어떻게 잠들 수 있겠니. 어떻게 꿈자리에서 뒤척일 수가 있겠니.
로저가 이 아파트에서 듣는 소리는 제한되어 있어. 브라이언의 목소리. 전화벨 소리. 초인종 소리. 사이렌 소리. 가스검침원의 발소리(그 사람이 문을 두들기면 언제나 쥐죽은 듯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리고 아파트 안내 방송. '우수관이 얼었으니 세탁기를 돌리지 마세요.' '수도관 점검으로 단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런 내용이었지. 하지만 가끔은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었어. 'K동 앞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였으니, 부디 주민 여러분께서는 교통 안전에 주의를.' 도로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아파트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던 차들이 서로 부딪히는 일이 흔했어. 가끔 그 차들은 사람과도 부딪히곤 했어. 한번은 일 톤짜리 트럭이 일곱 살짜리 어린애를 짓밟은 사고도 있었어. 끔찍하다고 로저는 생각했지. 역시, 바깥은 위험하다니까. 그 위험한 바깥 어딘가에 브라이언이 있는 게 틀림없었어. 이렇게 오지 않는 건 틀림없이 사고 때문이겠지? 경미한 사고였다면 즉시 로저한테 전화했을 텐데.
/걱정하지 마. 별 일 아냐.
하면서 머쓱하게 웃어줄, 로저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일 브라이언이었을 텐데. 로저는 브라이언의 마지막 말에 대해 생각했어. '지금 가. 조금만 기다려.' 조금이 아니잖아. 한참이잖아. 로저는 벌벌 떨기 시작했어. 브라이언에게 건너오라고 했던 건 자신이잖아. 그것 때문에 브라이언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떡해. '씨발 니가 없으면 나는 안 된단 말이야. 이렇게 좆된 인생에 남은 건 너밖에 없단 말이야. 내가 이 방에서 꿋꿋이 살아나가는 이유는 오직 너 때문이란 말이야. 이 멍청한 곱슬머리. 평생 이 네모진 아파트 안에서, 닐 기다리기만 하라는 거야?' 로저는 불안했어. 불안해서 연기 탓에 누렇게 변한 벽에 기대, 담배를 또 피웠어. 담배갑을 몇 개는 비워야 올 셈이지, 너는.
그리고 로저는 깨달았어. 기다려봤자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기다려봤자 이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직접 보아야겠다. 직접 네 아파트 문을 두들기고, 직접 단지 안을 돌아다니고, 그렇게 해서라도 너의 흔적을 쫓아야겠다. 그리고 발견하면 어깨를 탈탈 흔들 것이다. '이 개새끼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하고 물을 것이다.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질렸다.
사랑하는 브라이언. 로저는 너를 찾으러 갈 거야. 더 이상 아파트 그늘에 갇혀 있지 않을 거야. 햇볕 아래든 그림자 아래든 별빛 아래든 꼿꼿이 걸어갈거야. 그리고 너를 찾아내서 꼭 말할 거야. '밖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지?' 그럼 너는 웃어줄 거야. 멀쩡하고 말간 얼굴로 웃어주며, 천천히 말할 거야. '잘했어. 너는 나의 자랑이야, 로저.' 그 말을 듣고 로저는 오랜만에 행복할 거야. 그렇게 믿어. 그러니까 죽어 있지 마.
로저는 숨을 내쉬었어. 문 손잡이를 붙들었어. 삼 년 만이었어. 삼 년 만에, 드디어, 밖으로. 바깥의 브라이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