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계절
* 피폐 학원물.
* 군림하는 B의 충실한 심복, R.
* 소재주의.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상극으로 보인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 브라이언은 부자고, 친구가 없다. 로저는 가난하고, 친구가 많다. 친구가 없는 브라이언은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복종 받는 이가 어째서 친구가 필요하겠는가? 반면에 로저는 친구가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기 때문이다.
로저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로저는 재개발지구에 위치한 빌라에 산다. 빌라라고 해 봤자 번듯한 것도 아니고, 방이 고작 두 개. 커다란 방에는 항상 덜 마른 빨래가 걸려 있고, 창문이 깨져 있고, 외풍이 들어오고, 빗줄기가 방 안으로 쏟아진다. 작은 방에는 곰팡이가 가득하고, 빛바랜 분홍 이불이 나뒹굴고, 문짝 하나가 떨어진 장롱이 외로이 서 있다.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어머니는 매우 뒤늦게 귀가한다. 그녀는 로저가 집에서 담배를 피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저를 신경 쓰지 않는다. 어머니와 로저는 완벽한 타인에 가깝다. 로저는 낯선 어머니의 눈빛을 받을 때마다, 방구석의 장롱에 목을 매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들의 연락을 받으면 그래도 살맛이 난다. 그래서 로저 테일러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
오늘도 로저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재개발단지에는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몹시 많다. 그 중 이 층짜리 주택을 선택했다. 로저는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고, 펑크인지 로큰롤인지 정체 모를 음악을 틀었으며, 반쯤 취한 상태로 춤을 추었다. 친구 녀석들이 낄낄거렸고 박수를 쳤다. 밤새 그렇게 놀았다. 로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누군가가 로저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로저가 받아들었다. <브라이언>. 휴대전화에 찍힌 이름에, 로저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취기가 단박에 달아났다. ‘개새끼들아, 음악 꺼.’ 로저의 살벌한 선언에 펑크 음악이 뚝 끊겼다. 로저가 전화를 받았다.
-B.
-어디지?
-애들이랑.
-너 목소리가 취했다.
브라이언이 그렇게 말했다. 로저는 기뻤다. 브라이언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봐 주었기 때문에. 로저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감싸 안았다. 브라이언이 말했다.
-너 취하면 멍청해지잖아. 로저. 안 그래?
-아냐. 지금 다 깼어.
-거기서 계속 재미 보던지, 당장 여기로 오던지.
-으응, 당장 갈게. B. 조금만 기다려.
친구들은 만류하지 않았다. B가 오라고 시켰는데, 감히 친구들과 더 어울리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로저는 재개발단지를 떠났다. 발걸음을 재촉해 브라이언에게 갔다. 인적 없는 골목길이었다.
브라이언은 로저에 대해서 항상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가끔은 로저마저도 헷갈릴 정도였다. 로저는 그저 브라이언의 충실한 심복에 불과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끔 브라이언은 로저에게 더한 것을 바랐다.
-너는 나한테 충성한다면서, 왜 다른 새끼들과 놀아나고 있지?
그것이 브라이언의 의문이었다. 일상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브라이언은 주로 자신의 부모와 충돌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성질을 부렸다. 그러면 로저가 빌고 또 빌어야 했다.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것밖에 없었는데도. 로저가 그에게 비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브라이언의 허리춤 지퍼를 풀고, 입으로 그 짓을 해주는 것. 로저는 골목길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브라이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브라이언의 시선 속에서 네온싸인 불빛이 울렁였다. 멀리서 지하철이 이동하는 괴성이 들렸다. 로저의 머리채가 브라이언의 손에 쥐어뜯길 때면, 이제 끝났다는 신호였다. 로저는 한꺼번에 빨아들였고 브라이언은 로저를 밀쳐냈다. 브라이언이 바지 지퍼를 잠궜다.
-멍청하게 좀 굴지 마, 로저.
-…….
-그렇게 실실대면서 웃고 다니지도 말고.
로저는 뭐라 대답하고 싶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목 뒤편으로 점액질을 넘기느라 힘겨웠다. 뱉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브라이언의 것이니까. 로저가 골목길에 주저앉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브라이언은 또 떠나갔다. 그러면 로저는 또 후회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들의 관계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발전이라고는 없는 사이.
***
하교할 시간에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세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천둥 소리가 건물에 진동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나온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물기 가득한 복도는 부산했다. 로저는 비가 쏟아지는 것을 내다보면서 좆같다고 생각했다. 내려가서 한 녀석 우산이라도 강탈해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로저 테일러에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로저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과연 많은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 순간, 로저는 보았다.
브라이언이었다. 브라이언은 항상 시커멓고 펼치면 폭이 넓은, 긴 장우산을 썼다. 항상 브라이언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 정도는 알았다. 브라이언은 무언가 상념에 빠져 있는 듯 멈춰서 있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돌렸고 로저와 눈이 마주쳤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손에 우산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을 터인데, 무슨 변덕인지 브라이언이 손을 흔들었다. 로저는 기뻐서 냉큼 달려갔다. 브라이언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야?
-들어와.
처음에 로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 순간 브라이언이 우산을 펼쳤고, 로저의 어깨를 끌어 우산 아래로 밀어넣었다. 로저는 당황했다. 자신의 어깨에 닿는 브라이언의 손길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 무심하고도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손. 브라이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로저는 혼란스러웠다. 왜 얘는 나한테 우산을 씌워주지? 왜 이렇게, 갑자기, 다정한 흉내를 내지? 오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와중에도 기뻤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로저는 수줍게 웃었다. 평소의 로저 테일러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정문에는 브라이언의 차가 멈춰서 있었다. 잘 빠진 검은 세단. 브라이언의 아버지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브라이언은 항상 운전기사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무심히 차에 올라탄 그는, 로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지든지, 버리든지. 맘대로 해.
차가 출발했다. 로저는 자신의 손에 검은 장우산이 들려 있음을 발견했고, 놀랐다. 브라이언의 것이 자신에게 선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저는 떨리는 손길로 우산을 꼭 붙잡았고 아주 천천히 집에 돌아갔다. 습기 가득한 그 거리가 그리도 아름다울 수 없었다. 로저는 괜히 피식피식 웃었다. 브라이언이 붙잡았던 우산을 지금 내가 붙잡고 있다. 변태 같지만 즐겁다. 같은 우산 아래, 같은 우리. 로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혹시, 브라이언도 나를?’ 로저는 그러한 방식으로 기대하는 것을 즐겼다. 가망 없는 기대라는 사실은, 본인도 잘 알았다.
***
로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사건이 과거에도 또 있었다. 브라이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본 녀석들은 몇 없다. 웬만한 일에 브라이언은 잘 나서지 않는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저 테일러에 관련한 일이라면 조금 달랐다. 아무리 로저가 강한 싸움꾼이라고 하더라도 로저는 적이 많았다. 하도 많은 녀석들을 개패고 다녀서 그랬다. 로저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녀석도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정도였다. 로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뿌듯했다. 조심하라는 친구들의 주의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한번 깨져 본 새끼들은 쪽팔려서 다신 안 와.’ 로저는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H고 녀석들이 또 지랄이었다. 로저가 혼자 귀가하고 있을 때 목각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로저는 욕설을 뱉다가 린치당했다. 여섯 명 대 하나.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친구가 두려워하며 브라이언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테일러가 위험해.’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 녀석은 브라이언에게 직접 전화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내 답장이 돌아왔다. ‘위치가 어디라고?’ 녀석은 성실히 답장을 써서 보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이언이 도착했다.
그렇게 폭력적인 브라이언의 모습은 흔치 않았다. H고 녀석들이 들고 있는 건 고작 야구방망이나 목각 같은 것이 전부였다. 브라이언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벽에 기대어 세워진 낡은 삽을 발견했다. 브라이언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삽을 어루만졌고, 손에 쥐었다. 이내 한 녀석의 어깨에 대고 그것을 내리쳤다. 삽에 찍힌 자리에서 선연한 피가 흘렀다. 녀석이 부들부들 떨었다. 브라이언이 자세를 낮추고, 피를 흘리는 놈에게 속삭였다.
-내가 왜 테일러를 신경 쓰는 줄 알아?
-…….
-내 아래 있는 새끼들 중에, 제일 똑똑하고, 제일 멍청하거든.
H고 아이들은 브라이언의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읽었다. 살의였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녀석들. 두려워하며 단박에 내뺐다. 브라이언이 비웃었다. 로저를 내려다보았다. 로저는 바닥에 쓰려져 기침을 연신 뱉고 있었다. 삽을 끌고 다가오는 브라이언을 보면서, 로저는 환희에 젖었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 저 정도로 간지 나는 줄은. 브라이언은 친히 로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저는 영광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자세를 일으켰다.
-뒤통수에도 눈 달고 다녀. 테일러.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브라이언의 말투. 하지만 로저는 그의 작은 언사에도 너무도 기뻤다. 무엇보다 저를 위해, 브라이언이 친히 달려와 준 것이 몹시 감격스러웠다.
그 뒤로 로저 테일러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녀석들은 몇 없었다. 브라이언의 행동이 와전되고 과장되어 퍼졌기 때문이었다. H고 녀석 하나가 걔 삽에 찍혀 죽었대. 그런데 메이네 아버지가 돈으로 어떻게 덮었대나봐. 그 새끼한테 밉보였다가 진짜 죽는 건 일도 아니겠어. 무시무시한 새끼, 브라이언 메이. 브라이언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명성을 축적했다. 하지만 그 사이 로저 테일러의 애정까지도 쌓이고 있다는 걸, 브라이언은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
지금의 상황은 이러했다. 로저 테일러는 브라이언 메이를 사랑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로저 테일러에게 자꾸 착각할 만한 여지를 남긴다. 로저 테일러는 마음껏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 망상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로저 테일러는 운다. 브라이언 메이는 아직까지 우는 로저 테일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브라이언 메이는 여전히 무심하다. 그들의 생은 그러한 방식으로 굴러간다. 이거야 말로, 엉망인 인생.
‘청소년기의 사랑이 이렇게 힘든 것이던가?’ 로저는 종종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