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을 앓는 사람의 머리맡엔 편지를 두고 가라는 처방
* 등대지기 브라이언.
* 몸이 아파 바닷가로 내려온 로저.
* 바닷가에 띄운 병편지를 받아든, 로저.
로저는 오래 아팠고 그래서 바닷가로 내려왔다. 수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은 질문과 너무 많은 해답들이 있었다. 로저는 그 복잡함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바닷가 근처에 쓸쓸히 선 로저의 집. 간혹 가다 먼 해양으로 향하는 배들을 목격할 따름이었다. 그 배들의 행선지를 지정해주는 곳은 단 하나, 외딴 등대였다. 로저의 집에서 조금 걸어 나와 모래사장에 도달하면, 간신히 등대의 형체가 보였다. 가끔은 안개에 젖어 흐릿했으나 언젠가는 선명했다. 그 새하얀 몸체를 로저는 오래 보았다. 저 등대에는 사람이 살까, 라고 생각했다. 물론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다.
겨울이었다. 로저는 여유가 되어 겉옷을 싸매고 바닷가로 나왔다. 그때 발견한 것이었다. 파도에 밀려온 병을. 로저는 모래에 반쯤 파묻힌 그것을, 한참 굽어보았다. 코르크마개로 입구가 꽉 조여져 있었고, 건조하고 투명한 내부에 노오란 종이 한 장이 말려 있었다. 로저는 병을 집어들었다. 외부는 축축하고 미역 줄기가 감겨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병 편지라는 것일까? 로저는 기뻤다. 오랜만에 신이 났다. 의외로 로저 테일러는 작은 것에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수도의 큰 것들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로저는 웃었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밀어 넣었다. K부두라면 바로 이 근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항상 실루엣만 지켜보던 등대의 사람이 보낸 편지일 것이 분명했다. 그 편지는 먼 태평양을 헤엄치지도 못하고 이곳에 정박했다. 무언가 저에게 찾아온 커다란 행운 같아서, 로저는 조금 들뜬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내일이면 그 등대에 찾아가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가서 무엇을 말할지 한밤 내내 생각했다.
***
첫만남은 조금 서툴렀다. 로저는 브라이언에게 제가 받은 편지를 내밀었다. 브라이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로저가 바라본 등대지기의 첫인상은 마르고, 키가 크고, 머리가 덥수룩한 사람이었다. 등대지기라 해서 좀 괴팍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통성명을 했고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종종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친밀해졌다. 어느날 로저는 턱받침을 하고 브라이언에게 말했다.
“나는 마지막 기대도 다 포기하고 여기 왔는데, 당신을 만났어.”
“듣기 좋은 말이군요.”
“세상 끝 등대*에서 당신을 마주친 기분이야.”
“그래서 좋은가요?”
“응.”
로저는 킥킥 웃었다. 그들이 함께 지켜보는 바다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로저가 속삭였다.
“어쩌다 여기에서 일하게 된 거야?”
“처음에는 우주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쪽 공부를 하다가 어떻게 살다보니.”
“나도 어떻게 살다보니 여기로 왔는데.”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브라이언과 함께 있으면 실없이 웃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로저는 자신의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아침에는 일어나서 연신 기침을 했는데, 티슈에 혈흔이 묻어나올 때가 있었다. 로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브라이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참고로 전염되는 병 아냐.”
“그런 게 대순가요.”
브라이언이 천천히 로저를 끌어안았다. 로저는 처음으로 그에게 안겼다. 사람의 온기를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았다. 로저가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꽤 이름 날리는 아는 가수였어.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전국민이 아는 건 아니지만, 한 사분의 일 정도는 아는 수준. 놀랐지? 당신은 공부를 하느니 바다를 보느니 하면서 TV라고는 켜 보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유명하고 돈도 꽤 벌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 싫은 거야. 내 주변에 내가 감당하기 힘든 종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외롭다고 한 당신한테, 이거 참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지? 그렇게 사람이 싫어진 김에 몸도 아프더라고. 그래서 여기로 도망쳐왔어.’ 로저의 말을 들으며, 브라이언은 천천히 로저의 금발을 쓸어주었다. 힘없는 머리카락이 브라이언의 손길에 맞춰 여기저기 쓸렸다.
연애하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연애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로저는 브라이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잠깐은 자리를 비워도 되잖아. 로저는 사정했고 브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K항구는 이미 산업체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노쇠한 항구였고, 드나드는 배도 별로 없었던 탓이었다. 로저의 집에서 그들은 샴페인을 땄고 와인을 기울였고 블루스 음악을 틀었다. 브라이언이 듣고 싶다고 해서, 로저가 활동하던 곡도 틀었다. 로저는 민망해했다. 브라이언은 듣기 좋은 곡이라고 말했다.
몸을 섞은 후에는, 조금 달뜬 상태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로저는 제 기분이 좋은 것이 취기 탓인지 섹스 탓인지 브라이언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열기 오른 숨을 천천히 뱉었다. 브라이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저. 솔직히 믿겨져? 그 편지를 네가 받았다는 거.”
“나는 방금 우리가 섹스했다는 게 더 안 믿기는데.”
“좋았잖아.”
“좋았지.”
로저는 부정할 수 없어서 수긍했다. 브라이언이 큭큭 웃었다. 반쯤 열어둔 창문 너머에서 파도소리가 푸른빛으로 일렁이며 들어왔다. 그 소리를 오래 들었다. 듣다가 잠이 들었다. 로저는 그 날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꿈을 꾸었다. 버스 대신 자가용이 도착했다. 브라이언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멀리, 국경 너머까지 달리는 꿈이었다.
***
“몸상태가 좀 나아졌대. 신기하지?”
“다행이야.”
오랜만에 수도에 다녀온 로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침마다 기침 하는 것도 멎었고, 저혈압 때문에 눈앞이 깜깜해 쓰러지는 일도 줄어들었다. 로저가 털어놓은 사실을 듣고 브라이언도 기뻤다. 사실 로저의 병명에 대해 몰래 찾아본 적 있었다. 완치율이 고작 이십 퍼쎈트에 불과했다. 그래서 정말 염려하고 있었는데, 나아가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브라이언은 로저의 말라빠진 등을 평소보다 더 오래 끌어안았다. 로저의 몸에서는 오월의 햇볕 냄새가 났다.
등대지기란 직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기계가 발달하고 있는 시대였고 사람의 자리는 기계로 대체가 가능해지고 있었다. 등대를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브라이언은 등대를 떠나는 것을 권유받았다. ‘당장은 아니고 이년 정도 후에.’ 그것은 예의 바른 사직 권고였다. 그 소식을 듣고 브라이언은 며칠 내내 쓸쓸했다. 하지만 건강 탓에 들떠하는 로저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브라이언에게 로저는 그만큼 커다랗고 소중한 이가 되어 있었다.
연애를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났고, 일 년이 다 되어갔다. 로저가 어렵게 말했다. '앨범을 다시 내보지 않겠냐고 제안받았어. 다시 일할 때가 된 것 같아. 여기 정리하고, 수도로 돌아가려고.' 이별은 그렇게 통보하듯 찾아왔다. 로저는 미안해했으나 브라이언은 그를 축복했다. '지금까지 곡이 좋았으니까 다음 곡은 더 잘 될 거야.' 브라이언의 말에 로저는 울음을 터뜨렸다. 로저의 긴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브리, 여길 같이 떠날 생각은 없지?”
“응. 나는 아마, 평생 여기에서 살 것 같아.”
“보고 싶을 거야.”
“보고 싶을 거야.”
“가끔 찾아올게, 브리. 그때까지 여기 있어야 해.”
“기다릴게, 로저.”
기다릴 수 있을까.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이 바다를 떠나 있지 않을까. 로저의 차가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 국도의 끝을 상상했다. 로저는 수도에서 다시금 빛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 그렇게 빛날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그렇게 브라이언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 슬프지는 않은 이별이였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이별도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둘은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내 외로움을 거두어가주어서 고맙다'는 그 마지막 말을, 브라이언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품어두기로 했다. 때로는 하지 못한 말이 했던 말보다 더 커다란 무게를 가지는 법이었으니까. 바다는 계속해서 일렁였다. 바다는 전생의 비밀을 품고 있기라도 한 듯이, 내내, 수 세기 동안, 그렇게 흔들릴 것이었다. 다시, 겨울이었다.
*세상 끝 등대: 시인 박준의 시 제목